[5월의 칼럼] 지식인 죽이기 | 김주연 |

죽이기, 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물론 아직도 물이 간 것 같지 않은 이 말이 최근 내게 아주 실감 있게 들려온다. 사실 그 전에는 실감보다는 오히려 살벌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죽이기’일까, 표현이 좀 심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욱 이 표현이 정치나 정치인과 관련지어 회자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고 그 생각은 매우 씁쓸했었다. 그러던 내가 왜 이 표현에서 어쩔 수 없는, 힘이 쫙 빠지는 느낌으로 “맞아, 맞아” 하는 공감을 갖게 되었을까? 바로 내가, 이른바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열패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엠에프를 전후해서, 그리고 이른바 “국민의 정부” 출범을 전후해서 우리 사회는 극심한 돈 노이로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아니, 단순한 기억의 차원을 넘어 여전히 그 속을 헤매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본다. 갖고 있던 금부치를 팔고, 유망한 기업을 투자 유치라는 이름으로 팔고… 필요한 것은 그저 돈, 돈, 돈이었다. 이 현실 바깥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돈이 마침내 돈 세상을 만들었고, 지식인마저 그 아래 깔고 뭉개게 된 것이다. 돈에 의한 지식인 죽이기가 노골화되었다.
물론 돈이 지식인을 우습게 알아 왔다는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우습게 안 것은 아니지만, 청렴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 역시 돈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지켜온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강조되고, 경제적 실존의 의미가 날로 증대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같은 청렴주의가 더 이상 덕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쯤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인가. 돈은 그저 삶을 살아가는 도구 아닌가. 그렇기에 올바른 인간, 참다운 인생은, 그 표현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진부할 수 없는 인간의 길로 항상 깔려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올바른 인간, 참다운 인생은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역설되거나 칭송되지 않는다. 초등학교의 교훈이나 슬로건에서 그것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경쟁력 있는 한국인”이 들어서고 있다. 중·고교로 올라가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모든 학생들은 정보화, 세계화의 구호에 맞추어 움직여야 하며, 지향해야 할 마지막 가치는 “영어 잘 하는 유능한 기계”이다. 이 사정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 교육을 내려놓고, 돈 교육으로 줄달음질치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인은 돈 못 버는, 시대착오적 무능인으로 매도되고, 대학 정신이라든가 인문주의라는 말은 아예 터부시된다. 불과 2,3년 사이의 일이다. 지식인 대신 등장한 소위 ‘신지식인’이라는 낱말이 모든 이같은 현실을 압축해 말해준다.
그러나 ‘신지식인’이란 없다. 구태여 ‘신-‘ 자를 꼭 쓰고 싶다면, ‘신경영인’ 혹은 ‘신기술인’이라는 표현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어울려 보인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은 예나 이제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본질은 비판 정신이기에, 어떤 인간, 어떤 사회도 이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인이라는 표현에 새로운 수식을 가하는 일은 그 본질과 기능에 대한 수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 위협은 작금의 대학 사회에서 바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학부제, 연봉제, 고객 중심제라는 새로운 제도는 많은 그럴싸해 보이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학인, 즉 지식인의 비판 정신을 둔화시키면서 대학을 기능인 집단 내지 경영 훈련장쯤으로 내려놓을 것이 뻔하다. 벌써 많은 대학들이 공공연하게 그 노선을 선언하고 있으며, 정책당국 또한 갖가지 방안으로 이를 유도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일찍이 인간 이성이 도구화에 직면하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이처럼 국가를 포함한 전 사회가 지식인 죽이기에 앞장서다니!

* <<문학과지성>> 창간 동인이며 숙명여대 독문과 교수인 비평가 김주연은 <<상황 인간>> 이후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에 이르는 여러 문학 평론집들과, <<독일 문학의 본질>> 등의 독문학 연구서들을 펴냈다.
(20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