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데쟈-뷔 | 박성원 |

소년은 떨어지고 있는 해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해는 자신의 알몸을 가린 채 소년의 등과 뒤통수에 숨어 있었다. 그런 해의 모습은 얼핏 보아 후광 같기도 했지만, 다르게 보면 소년의 뒤에 숨어서 소년을 집어삼킬 괴수의 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나 그리고 골목길을 한 동안 걸어 소년의 무릎을 지날 때까지 소년은 쭈그린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앉아 있는 소년을 피해 한 발짝 좌측으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놀이에 빠져 있기에 사람이 지나쳐도 비켜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골목의 귀퉁이가 아닌 한 가운데에 앉아서, 또래의 친구도 없이 혼자 그러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런 놀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빨랫줄에서 떨어진 속옷처럼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괜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계속 길을 재촉했다.
내가 두번째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골목길 한가운데 소년이, 그것도 조금 전의 그 소년이, 첫번째 골목에서처럼, 멍청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목길이란 게 대부분 비슷해서 어디선 본 듯한 기시감(deja-vu)이 들게 만든다지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까지 똑 닮게 있어,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더군다나 두번째 골목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분명 나는 거의 직각으로 돌았었다. 그러니까 내가 걸어왔던 길이 해가 지고 있는 서쪽 방향이었다면 이번엔 분명 북쪽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해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야비하게 소년의 등에 숨어서, 마치 후광인듯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내가 걸어왔던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골목에는 한 소년이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서, 참으로 멍청하게도, 바닥을 훑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최대한 빨리 고개를 다시 돌려 두번째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번째 골목에서도 역시 못생긴 소년 한 명이, 여전히 골목길 한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안타까웠다. 소년은 서로 다른 두 명인지, 아니면 한 명이 재빨리 뛰어와 장난을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착각을 일으키는 건지… 이런 일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속상했다. 두 장소를 동시에 보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 아픈 일인지는 몰랐다. 차라리 눈이 사시였다면 나는 두 장소가 동시에 보이는 정점에 서서,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소년의 경우는 접어두고라도 여전히 해가 소년의 등뒤에 숨어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년을 지나치면서 그 소년을 내려보았다. 여전히 소년은 무르춤한 자세로 앉아서 바닥만 훑고 있었다. 하지만 무무하고도 허망해 보이는 그 모습은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비단 조금 전에 첫번째 골목길에서 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하릴없이 쭈그리고 앉아 마냥 바닥을 관찰한 듯했기(deja-fait) 때문이었다.
나는 소년을 지나치려다 소년에게 물었다.
–넌, 누구니?
그렇게 물었지만, 내 물음이 성대를 우집고 올라와 공기를 타는 순간 나는 후회했다. 대체 그렇게 멍청한 질문이 있을까. 세상에, 넌 누구라니…
소년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소년을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애야, 세상에 그런 대답은 없단다. 아무 것도 아니라니.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없단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다시 웃었다. 웃기는 했지만 나는 분명 그런 설명을 언젠가 한번 한 것 같았다(deja-raconte). 하지만 언제 설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년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다시 말했다.
–그럼 제가 바람인가요?
–하하, 그렇게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니? 네가 어떻게 바람이겠니.
–그럼, 제가 돌맹이인가요?
–하하, 아니.
–그렇다면 저는 꽃인가요?
–물론 아니지. 너는 바람도 돌도 꽃도 아니야. 그렇다고 고양이도 원숭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제가 무엇인가요?
–너?… 너는…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요런 맹랑한 놈을 봤나. 소년에게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는 내가 무척이나 한심했다.
나는 소년의 앞에 서서 대답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분명 언젠가 그런 질문을 들은 것도 같았고(deja-entendu), 또 거기에 알맞은 어떤 대답이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쉽사리 떠올려지지 않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자 우선 소년은 인간이라는 점이 떠올려졌다. 그것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만약에 내가 소년에게 너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소년이란다, 하고 말한다면 도대체 다른 수많은 소년들과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내가 소년에게 들려줄 정보는 더 이상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생각들을 언제가 분명 생각한 것(deja-pense) 같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입술을 쭈뼛거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골목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두번째 골목을 지나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포실한 나의 집까지 가기 위해선 세 개의 골목길을 지나야한다). 그곳에는 언제간 보았던 것 같은 골목과 소년이 똑같이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것 같아 방금 지나온 두번째 골목으로 가보았다.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다시 첫번째 골목까지 뛰어 갔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년이 있던 첫번째 골목과 두번째 골목과 세번째 골목을 단숨에 뛰어갔지만 여전히 내 눈앞에는 똑같은 골목과 해를 등지고 앉아 있는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벗어나려고 아무리 뛰어다녔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특징이라곤 조금도 없이, 그리고 변별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하나도 없이, 모든 골목길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미로와 같았다. 더구나 석양은 늘 골목길의 끝에 있어 도저히 방향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몇 번째 골목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똑같은 골목길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더위를 먹은 것도 아니었고, 술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깟 골목길 하나 벗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숨을 돌리면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분명 언제가 내가 보았던 것이었고 또한 언제가 내가 했던 일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였는지, 그리고 실제로 보긴 보았는지 하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는 소년을 올려다보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소년은 내가 들어왔던 골목길을 아주 서서히 거슬러 갔다. 소년은 골목길을 걸어나가는 동안 차츰 자랐다. 해가 질수록 그림자가 길어지듯이 소년의 키와 몸이 시나브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정도의 키에, 나와 비슷한 체구에, 또 나와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어느새 변해갔다. 그 모습은 언젠가 보았던 모습이었고, 나는 아직도 지지 않은 태양을 등진 채 앉아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채, 떠나는 소년의 뒤만 바라볼 뿐이었다.

* 소설가 박성원은 <<이상, 이상, 이상>> 이후 새로운 소설집을 준비 중이다.
(20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