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서울에 사는 행복? | 김치수 |

어렸을 때 몸이 허약했던 나는 초등학교 중등학교를 내 고향에서 다녔다. 8형제의 다섯째인 나는 형들이 전주와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하고 하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형들처럼 도회지에 나가서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부친은 내게 몸이 허약해서 내보낼 수 없다며 고향의 중학교에 다니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나는 할 수 없이 시골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생이 되도록 나는 여름마다 학질에 걸리고 겨울마다 감기에 걸릴 정도로 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6.25 전쟁으로 가세가 기울어진 데다가 위로 네 아들을 도회지에서 살게 하느라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지 않았을까 짐작되지만, 혼자서 자수 성가한 부친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사춘기인 그 시절을 시골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다행으로 여겨진다. 높은 산은 없지만 구릉 같은 야산 지대인 내 고향은 동네만 벗어나면 소나무 숲이요 밤나무 숲이며 참나무 숲이다. 그리고 숲을 하나 지날 때마다 나타나는 작은 마을에는 우리 반 친구들이 살고 있고, 가는 곳마다 가친이나 문중 소유의 산과 논밭이 있어서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 어린 시절에 논밭이나 숲에서 딩굴며 논다는 것은 환상적이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곤충과 물고기, 과일과 열매, 숨을 곳과 놀감 등이 있어서 왼 종일 바깥에서 놀아도 어둡기 전에는 방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을 가지고 방안에서 놀아야 하는 요즈음의 어린이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자주 아팠지만 그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셈이다. 내 고향에서는 서북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선운사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때부터 그곳은 원족으로 가는 곳이다. 구시포의 황금빛 석양은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고 선운산의 빼어난 경관은 동백꽃과 함께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추억으로 기억된다.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를 다닌 시골에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년 남녀 합해서 38명이 졸업을 한 시골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부친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천하장사 항우에게 글을 가르쳤더니 글을 좀 읽을 줄 알게 되자 항우는 글 배우는 것을 중단해 버렸단다. 그의 말인즉슨 사내 대장부에게 문자는 이름 석자를 쓸 줄 알면 족하지 글은 더 배워 무엇 하느냐고 했다는 데 너는 무엇 때문에 공부를 더하려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나는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것은 힘만 세고 무식해서 덕을 쌓을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나는 잠결에 부친이 모친에게 ‘이 아이가 공부를 하고자 원할 때는 원하는 만큼 시킬 생각이니 그리 알아두게’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부친은 서울에 가서 사흘만에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사왔다. 평소에 부친이 존경하는 인촌 선생이 설립한 중앙고등학교의 입학원서였다.
1956년의 서울은 아직 폐허 상태였다. 그러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자체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특히 학교 옆에 있는 삼청 공원과 집 옆에 있는 남산공원은 바깥에서 헤매며 자연과 함께 생활해온 나에게는 방대한 놀이터였다. 게다가 자하문 밖에 가면 자두 밭과 사과밭이 있고 태능에 가면 배 밭이 있는 서울은 ‘자연 만세’의 도시였다. 고등학교에서 소풍으로 갔던 기억을 더듬어 관악산을 갔다가, 길을 잃고 상도동 버스 종점을 찾지 못하여 헤매던 불안하고 피곤했던 기억, 친구들과 백운대에 갔다가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우이동으로부터 돈암동까지 걸어와서 마지막 전차를 타고 귀가했던 기억 등은 ‘서울 예찬’을 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된다.
아직도 나는 주말이면 북한산에 등산을 한다. 한때는 왼 종일 북한산의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을 헤매고 다녔지만 함께 다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향로봉과 보현봉 사이를 몇 시간 동안 걷는다. 매주 오르는 산이지만, 북한산에 가면 행복해지고 북한산이 있어 서울이 살만한 도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요즈음 그 산이 깎이고 가리워지고 있다. 산허리를 잘라 고급 빌라를 짓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이북오도청이 들어서서 산봉우리를 가리고 북악터널 앞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서 북악산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북한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정릉이나 우이동이나 불광동이나 문화촌처럼 북한산의 기슭에만 고층 아파트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락산이나 불함산이나 관악산과 같은 서울 근교의 큰 산 주변에도 고층아파트로 꽉 차있다. 그 뿐만 아니다. 시골에 가면 논 한가운데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인가가 드문 산기슭에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 국토가 아파트로 덮이지 않을까 우려된다.
아파트가 우리 나라의 주택난을 해소하는 데 기여한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파트로 이렇게 전 국토를 무질서하고 난잡하게 도배하는 현상은 우리 후손들에게 거대한 흉물을 물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왜 아파트는 다 똑같아야 하고 왜 꼭 아파트만 지어야 하는가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우리 나라처럼 획일적으로 아무 데나 흉물스러운 아파트를 세우는 나라는 없다. 이것도 어쩌면 개발독재로 치달았던 군사문화의 유산일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시멘트벽으로 덮어놓고 어떻게 그것을 잘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최근에는 그 못생긴 아파트를 평당 2000만 원 짜리 호화 아파트로 짓는다고 한다. 돈이 얼마나 많으면 고층 아파트에 그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본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단 말인가. 많은 돈을 공익 재단이나 교육 재단에 기부를 못하겠으면 유적이 될만한 집을 지어서 문화유산이라도 되게 할 일이지 그런 아파트를 호화롭게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프랑스의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졌다. 그 당시 프랑스 정부는 만국박람회의 개최를 기념하고 프랑스가 철강과 과학 기술의 강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거대한 철탑을 세우고자 했으나 지식인들은 그것이 아름다운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고 해서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 당시 유명한 작가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서 파리를, 프랑스 자체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파리 시내 어디에서 보이고 아무 데서나 발견되는 에펠탑 때문에 외출마저 기피했다고 한다. 그는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건축을 하게 되면 에펠탑이 된다고 말하면서 누가 자신을 식사에 초대할 때 에펠탑 2층 식당이 아니면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식당에서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길에 사직터널을 빠져 나오면 안산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고층 아파트 군을 보게 되고 저녁의 퇴근길에 금화터널을 빠져 나오면 인왕산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고층 아파트 군을 보게 된다. 서울의 도심에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처럼 도시계획을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도시계획을 모르는 사람일까 아니면 뇌물을 받은 부패 공무원일까. 서울에 사는 행복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나는 나의 고향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랬다. 마을 밖에 있던 구릉 같던 야산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빨간 황토 흙을 드러낸 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른바 개간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없애고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밭을 만든 것이다. 그로 인해서 고향 마을의 평균 소득이 높아졌다고 하니 할 말이 없지만, 길게 보면 어느 것이 소득을 증대시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아무런 확신이 없다.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의 모습만 다시 찾을 길 없어져 버렸다.

* <<문학과지성>>의 창간 동인이었으며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이기도 한 비평가 김치수는 <<한국 소설의 공간>> <<문학 사회학을 위하여>> <<문학과 비평의 구조>> 등의 평론집 이외에도, 많은 편서와 역서를 펴냈다.
(20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