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봄밤은 깊어가고 | 임철우 |

봄이 성큼 깊었다. 캠퍼스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목련이며 철쭉, 진달래 같은 꽃들은 사라진지 한참 전이고, 어느 새 키 큰 아카시아들이 가지마다 흰 밥알 같은 꽃 봉지를 그득히 달고 늘어 서있다. 대기는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차 있어서, 바람결 따라 그 알싸한 꽃내음이 사방으로 난분분 퍼져 날린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불현듯 코로 스며오는 향기에 가슴이 절로 부풀어오르고 술이라도 한 잔 마신 듯 눈앞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과연 좋은 시절이지 뭔가.
엊그저께 일이다. 밤늦게까지 학교 연구실에 남아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있는데, 남학생 하나가 노크를 하고 불쑥 들어선다. 삼 수 끝에 들어온 이 학년 학생인데, 껑충하게 큰 키에 두터운 안경을 쓰고 언제나 강의실 귀퉁이에 혼자 앉아있는 녀석이다. 늘 그렇듯 우주의 고민을 모조리 혼자 짊어진 얼굴. 오늘은 유난히도 멍한 눈에다가, 어디서 한 잔 작심하고 마셨는지 눈두덩이며 광대뼈가 발갛다.
녀석이 내 방을 직접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말수 적은 친구가 왠 일인가, 혹시 아버지가 실직해서 충격을 받은 건 아닌가. 하도 넋 나간 듯한 녀석의 표정을 보자마자 대뜸 가슴부터 막막해져왔다. 최근 이삼 년 동안 그런 일로 학교를 그만 두거나 안타깝게도 풀이 팍 죽어 다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웬 일인가, 이렇게 늦은 시각에…”
“후유우. 어쩌면 좋습니까, 교수님. 전 정말이지 더는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요.”
녀석은 의자에 앉자마자 첫마디가 대뜸 그랬다. 어이쿠, 이거 심각하구나! 바짝 긴장해서 몇 마디 들어보니, 이 친구, 뜻밖에도 가망 없는 짝사랑 때문에 아예 얼이 반쯤 나간 눈치였다. 대상은 세 살 연상의 대학원생이라는데,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 더 얘기를 들어볼 것도 없이 십중팔구 이루어 질 수 없는 꿈 같았다. 예감이 그랬다.
“그건 그렇고, 왜 하필 나를 찾아왔지?”
“저어, 아무래도 작가이시니까 누구보다 제 심정을 잘 이해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또 언젠가 교수님께서 짝사랑 경험담을 얘기해 주셨던 기억이 나서요. 그래서…”
이게 무슨 얘기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젠가 소설 강의 시간에 농담 삼아 내 첫사랑이 어쨌느니 저쨌느니 하고 주책없이 몇 마디 지껄인 기억이 난다. 사실 그건 너무나 빤한 멜로드라마를 상당 부분 차용해서 내가 즉석에서 창작해 낸 얘기였는데, 이 답답한 친구가 그걸 정말로 알아듣고는 나름대로 동병상련의 동지로부터 뭔가 뾰족한 해답 같은 걸 기대하고 찾아온 눈치였다. 난감하고 황당한 기분에 입맛이 떫었다. 하여간 늘 이놈의 입이 방정인 것이다. 쓸데없이 혀를 놀리다보면 언제이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이 친구, 딴엔 하도 괴로워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엉뚱하기도 하고, 요즘도 이런 순정파가 있나 싶어 대견키도 해서 나는 느닷없는 카운셀러 역을 기꺼이 맡기로 했다. 펼쳐 둔 책을 밀어놓고 나는 본격적으로 면담을 시작했다.
“그래, 나 역시 자네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다구. 지금은 세상이 끝난 것 같이 괴롭고 허망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경험도 없지. 자, 어디 처음부터 자세히 얘기해 보게.”
나는 마치 그 분야의 전문가인양 어느 새 조금 우쭐해져서 물었다. 녀석은 자신의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대하여 한참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비장한 음성과 비통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짝사랑이 그러하듯, 그것은 아주 진부하고 통속적인 스토리였다. 그럼에도 난 주책없게도 조금은 감동하고 말았다.
아, 당연히 그럴밖에. 난들 왜 그 심정을 모르겠는가. 하루 온종일 눈에 뵈는 것이라곤 오직 단 한 사람의 얼굴뿐임을. 눈을 뜨나 감으나 주위를 맴도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눈빛, 음성, 걸음걸이, 웃음소리뿐임을. 그 사람이 날마다 오가는 거리, 살고 있는 동네, 하다못해 앉아서 다리를 달달 떠는 버릇이며 코 푸는 소리까지도 더없이 특별하고 그윽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그 비련의 청년을 위해 나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래 잘 찾아왔네. 이래 뵈도 내가 그 방면에서는 왕년부터 전문가지. 어차피 틀린 거라면 무조건 잊어버려. 우선은 그냥 참고 견뎌내는 거야. 그러다 보면 먼 훗날, 아 그때가 참 아름다웠구나 하고 추억하는 행복도 있음을 알게 될 거라구. 또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자네가 그렇게도 꿈꾸고 기다렸던 또 다른 사람, 바로 자네의 진짜 이상형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떠억 나타나게 될 걸세. 틀림 없다구. 허허.”
나는 꽤나 근사한 충고를 해 주었다는 생각에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교수님은 지금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우리야 뭐, 중매로 만났지. 왜?”
무심코 대답했는데, 녀석의 표정이 별안간 장마 비에 흙담 무너지듯 와르르 허물어져 내리는 거였다. 아차, 이놈의 입이 또 방정이지 뭔가. 뒤 늦게야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니까, 평생 꿈꾸던 진짜 이상형을 중매를 통해서 만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얘기가 그, 그렇게 되는 건가.”
순간, 녀석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하고 기묘하게 변했다. 배신감, 한심함, 거기에다가 연민 같은 것조차 섞인 듯한 눈빛으로 나를 한동안 멀거니 건네다 보더니, 녀석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달아나 버렸다.
녀석이 사라진 뒤 혼자 남은 나는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모른다. 사실 말이지, 나 또한 가슴 미어지는 짝사랑의 추억이 어찌 한 둘이겠는가. 또 추억도 추억 나름이지, 아름답기는 무슨!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저 가슴 아프고 서럽고 허망하기만 할뿐인걸.
홧김에 창문을 왈칵 열어 젖히니, 뒷산 등성이 너머로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다. 봄밤은 바야흐로 녹작지근하게 무르익었는데, 으마, 까닭 없이 맘이 싱숭생숭하다. 고연 녀석! 공연히 찾아와가지고설랑……

* 한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소설가 임철우는 첫 소설집 <<아버지의 땅>> 이후, 장편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 아래 휘파람>>, 광주 항쟁을 주제로 한 대하 소설 <<봄날>> 등을 펴냈다.
(20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