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디지털의 자유와 저항 |김동원 |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 오늘 자연 시간에 배웠는데요 글쎄 지구가 빙글빙글 돌고 있데요.”
할머니, 아연 놀란 얼굴로 말하시길,
“얘, 그런 위험한 데는 절대로 가지 말아라.”
나는 할머니의 그 위험한 지구에서 40여년을 전혀 위험을 느끼지 못한채 무사무사하게 살고 있다.
사실 할머니의 그 위험한 지구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때 안전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동의 자세로 같은 자리를 지키는 앉은뱅이였다. 그 시절 모든 노고는 태양의 몫이었다. 태양은 아침이면 앉은뱅이 지구의 동쪽 편을 기어올라 저녁이면 서쪽으로 꼬리를 사리며 하루의 발걸음을 마무리하는 반복된 노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역의 끝에서 하루의 시간이 밀려갈 수 있었으며, 그것이 쌓여 한 달, 한 해를 넘기는 시간의 흐름이 되었다.
알다시피 그 분주하던 태양의 발목을 꺾어 자리에 주저앉힌 것은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리고 그는 앉은뱅이 지구에게 손을 내밀어,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날부터 이제 하루와 한 해의 시간을 밀고 가는 고행의 발걸음은 지구의 몫이 되었다. 지구의 노역은 태양과 달리, 다시 말하여 뜨고 지는 단순한 동선의 움직임이 아니라, 스스로 빙글빙글 돌면서, 동시에 이제 앉은뱅이가 된 태양을 한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또다시 돌아야 하는 이중의 움직임이었다. 때문에 지구의 움직임은 사실 할머니의 염려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고 어지러운 것이었으며, 또 힘겨운 것이었다.
할머니를 놀라게 했던 손녀와 마찬가지로, 내가 자연시간에 배운 지식에 의하면 지구나 태양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정작 나에게 놀라웠던 것은 그것이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동의 자세에서 일으켜 세우거나 그것의 발목을 꺾을 수 있었던 경이적인 힘의 실체였다. 어떤 힘으로 그것은 가능했던 것일까? 상상력?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 그런 힘의 원천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꿈꾼다. 나는 중력의 구속을 뿌리치고 지상을 박차올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꿈꾼다. 나는 허파로 제한되는 지상의 호흡을 뿌리치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알갱이 속에 녹아있는 공기를 자유롭게 골라마시는 물고기의 유영을 꿈꾼다. 나는 그렇게 상상의 공간을 마음대로 나르고 헤엄친다. 그곳에 제한은 없다. 그곳은 자유의 공간이다.하지만 과연 그럴까? 상상력에 이끌려 돌아다닌 그곳이 과연 자유의 공간이었을까?
내가 하늘을 나는 자유를 꿈꾸었을 때, 사실 그것은 새를 복제한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내가 유영의 자유를 꿈꾸었을 때, 사실 그것은 물고기를 복제한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상상력은 사실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허구의 공간에서 이룩되는 현실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 허구의 공간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의 중력에 구속되어 있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자유롭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이제 상상력은 그 힘의 원천이 아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의 발목을 꺾고, 앉은뱅이 지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 비밀이 있었던 것인가? 나는 어느 날부터 그 힘이 자유와 저항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에게 있어 자유와 저항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로운 자는 저항하는 자이며, 저항하는 자가 자유로운 자이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어 우리의 삶은 구속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코페르니쿠스로 돌아가보자. 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 또한 처음엔 매일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고 느꼈으리라.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아무도 그 앞에서 구속을 느끼지 않는다. 구속의 느낌이 없는 곳에 저항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앞에서 구속을 느끼고, 그 자연스러움에 저항하는 자유를 갖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의 힘앞에서 자연스러움으로 위장하고 인간의 시선을 지배했던 구속의 현실이 막을 내렸다.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빙글빙글 도는 지구의 위험한 움직임을 분명히 감지했으리라. 그리고 그의 몸은 한순간 뒤뚱거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자유와 저항으로 과연 무엇이 바뀐 것일까? 오늘도 여전히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걸음하고 있으며, 그것은 내일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바뀐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이다. 그렇게 아직도 구속된 세계를 자연스럽게 사는 자들에 있어 그 새로운 세계는 감지되지 않는다.
언젠가, 정과리는, 이인성의 소설을 말하는 해설의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가리켜, 허구를 뒤집어 엎는 허구라고 말했다. 여기서 앞의 허구란 마치 태양이 뜨고 지는 것과 같이 매우 현실적으로 보이면서도 사실은 허구인 현실을 가리키며, 뒤의 허구란 물론 그의 소설을 말한다. 때문에 나는 그의 소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본다. 그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 지구의 현실에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구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지구의 움직임이 잘 감지되지 않는 연유와 흡사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서 내가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 자유와 저항의 위험스런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구속의 상상력에 의한 얄팍한 거짓 자유가 아니라 근원적 자유가.
요즘 들어 또 하나 내가 그 자유와 저항을 읽어내고 있는 매체는 디지털 문명이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그 문명 앞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속도이다. 그 문명은 거리의 장벽을 없애버렸고, 시간의 벽도 무너뜨렸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속도감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다. 일주일이 걸리던 바다 건너와의 통신이 5초를 넘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속도감에 취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은 무서운 자유의 폭발력이다. 그 디지털 문명의 자유와 저항이 겨냥하는 대척점엔 물론 아날로그 문명이 서 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전과 후의 세상이 똑같으면서도 다른 것과 같이 다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지금 컴퓨터 화면에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시계를 하나 띄워놓고 있다. 숫자로 표시된 디지털 시계가 아니라, 아날로그 시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겉으로 보면 이 앞에서 세상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나는 벽의 시계를 쳐다본다. 초침이 제식 훈련에 잘 길들여진 훈련생처럼 절도있게 발걸음을 탁탁 끊으며 원판 위를 돌고 있다. 컴퓨터의 화면에서도 나는 똑같은 움직임의 초침을 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컴퓨터 화면 속의 초침의 움직임이 사실은 실제 벽시계의 초침처럼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연속된 움직임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점의 명멸이 만들어내는 단절된 움직임의 환영이란 것을. 하지만 그것은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도 여전히 지구가 돈다는 것이 감지되지 않듯이.
나는 이인성의 소설이 벽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처럼 그렇게 연속된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 위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명멸하고 있는 초침처럼 깜빡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그 명멸 속에서 자유와 저항을 읽는다. 오랫동안 우리를 묻고 있던 아날로그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읽는다.
디지털의 속도를 버리고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사실은 누천년 동안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몸을 묻고 있었던 아날로그 세계의 온갖 구속을 보게 되며, 그에 대한 저항과 자유가 바로 디지털의 폭발력임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희망은 이 변화된 시대의 지평 위에서 시인과 소설가들이 그 디지털 문명의 해방과 자유에 눈떴으면 하는 것이다. 현재의 느낌으로 보면, 희망과는 달리, 그들의 거의 대부분은 디지털 세계를 아날로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유와 저항은 역시 쉽지 않은 것인가 보다.

* 비평가 김동원은 <궁극적 인간 해방을 위한 자리매김–이인성 론> 등의 많은 비평을 발표했으며, 첫 비평집을 준비 중이다.
(200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