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밟는 사람, 밟혀주는 사람 |이청준 |

이십 년 전쯤 읽은 일본 작가 엔도우 슈우사구의 소설 <침묵>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소설은 우리에게 ‘성녀 줄리아’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에도(江戶) 시대의 일본 그리스도교 박해사를 배경으로 한 한 서양 신부의 배교(背敎)의 곡절을 그린 것인데, 그 배교의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다.
당시 서양의 그리스도교 본부에서는 이 먼 동방 나라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선교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확고한 신앙심으로 잘 무장하고 떠나간 신부들은 웬일인지 일본 땅에 닿은 족족 초지가 꺾이고 마는 무참스런 배교의 소식만 돌아온다. 그래 종당에는 선교 본부의 한 신부가 직접 그 곡절을 알고 싶어 스스로 길을 나서 마카오 등지에서 미리 현지의 사정을 익히고 일본 땅으로 잠입해 든다. 그리고 그 역시 다른 선행자들처럼 일본 특유의 신앙적 정서와 독자적 세계관, 그리고 대항 불능의 폭력적 위협 앞에 무력한 배교의 의식을 맞게 된다.
그 배교 의식이란 다름아니라 그가 섬겨 온 예수의 성상(聖像) 얼굴판을 제 발바닥으로 내려 밟는 것. 그런데 이미 배교를 결심하고 나선 신부로서도 차마 그 성상의 얼굴을 밟지 못한다. 이미 수많은 배교자들의 발자국 때가 그 얼굴을 무참하게 더렵혀놓고 있기 때문이다. 신부는 밟히고 밟혀 더럽혀진 그 예수의 초라한 얼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수심기에 차 있는 듯한 한 가엾은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슬픈 눈물만 짓고 있다. 그러자 그 사내가 망설임 속에 울고만 있는 신부에게 조용히 말한다.
–아들아, 망설이지 말고 나를 밟거라. 나는 이렇게 밟히러 온 자가 아니냐. 어서 밟거라.
우리는 얼마 전 ‘옷 로비’ 사건 때 비슷한 배교의 의식을 목도한 바가 있다. 네 여자가 성경에 손을 얹고 다른 진실을 맹세했다면, 적어도 그들 중 몇 사람은 분명 자신의 거짓말로 그 성경 말씀을 짓밟는(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배교를 감행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추호의 망설임이나 ‘밟힌 자’ (밟힌 자가 어찌 예수나 그 말씀뿐이랴)들에 대한 동정이나 회오의 눈물 한 방울 없이.
하지만 내가 오늘 그 ‘침묵’의 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물론 그 배교의 눈물 없음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눈물이 없는 배교가 더욱 비정한 노릇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짓는 자의 배교 역시도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 눈물짓는 자의 배교가 아니라, 진실로 그를 용서하고 기쁘게 밟혀 준 그 낮은 곳으로부터의 예수의 조용한 사랑 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침묵’의 예수야말로 내가 그림이나 그림으로 만난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수의 모습이거니와, 그런 예수의 모습이 하필이면 박해가 그토록 자심했던 동양 땅에서 태어났음은 또 다른 비의가 담긴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굳이 일본의 경우를 들춰 말할 필요 없이, 오늘 우리에게는 정치인이나 재력가나 종교 지도자나 모든 힘있는 자들 가운데에 앞장 서 큰 소리치고 밟기 좋아하는 자들은 많이 보지만, 모르게 조용히 밟혀주는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경우는 그리 찾아보기가 어려운 듯싶으니 말이다.

* 소설가 이청준은 <<별을 보여드립니다>> 이후, <<당신들의 천국>> 등을 거쳐 <<목수의 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편 및 소설집을 펴냈으며, 현재 전집 간행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0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