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누가 나를 묶었나? |조경란|

친구의 소개로 칠월미술학원을 처음 가본 것은 지난 삼월의 일이다. 삼월이긴 했지만 귀가 시릴 만큼 찬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낯선 거리에 서서 나는 미술학원 원장과 친구를 기다렸다. 얼마쯤 후에 그들을 만나 몹시 계단이 가파른 낡은 건물 삼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지속적으로 그곳을 다닐 거라는 예감은 들지 않았다. 뭣보다 나는 어깨가 오그라들 만큼 추웠고 집에서 꽤 먼 거리인 그곳이 낯설고 두려웠으며 화장실은 나빴고 계단은 가파랐다.
내게 그림을 가르칠 선생님 두명이 아직 대학 재학생들이어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림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림에 대해 무슨 탁월한 심미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내가 어떻게든 이곳을 다니겠구나, 이들에게 그림 공부를 배워도 되겠구나 생각한 건 밤의 술자리에서였다. 맥주를 마시다 문득 스물일곱의 원장 선생이 시 한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틀림없이 기형도의 시였다. ……삼월 첫주부터 나는 칠월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취미반을 담당하는 이선생이 어느날 내게 묻는다. 소설가가 왜 그림을 배울 생각을 했느냐고. 입을 꼭 붙이고 앉았다가 더듬거리며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소설에서 좀 멀어지면 소설이 보일까 해서요, 라고. 그 무렵 정말이지 나는 돌연히 시각장애인이 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소설에 대해, 그리고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란 영화를 보면 시각장애인인 애인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남자가 그녀를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치는 장면이 나온다. 시각장애인인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그의 냄새만을 맡게 된다. 영화를 본 건 그 후였지만 어쨌거나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좀체 보이지 않는 소설의 냄새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참담함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에둘러도 길은 보일지 몰랐다.
나는 덧붙였다. 소설에서 한 번도 풀어내보지 못한 나의 상상력을 그림으로 형상화시켜볼 수 있다면 한다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노트북 앞에 앉을 때의 그 극심한 공포에서 벗어나보고 싶다고. 이선생이 내게 그런다. 어떤 예술을 하든 그 공포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나는 후딱 그를 돌아다봤다. 젊은 청년의 눈동자에 침울함과 때로 그 공포와 싸운 흔적이 깃들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안의 상상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더더군다나 흰 여백을 앞에 두었을 때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나의 그림은 지나치게 꼼꼼하고 단정하며 상상의 여지가 없고,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수채화를 할 땐 선뜻 짙은 색감을 사용하지도 못한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화실 선생님들이 ‘나’의 어떤 일면을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수업이 끝나고 가끔 화실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맥주를 마실 때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소묘를 하면 정밀묘사처럼 보이고 수채화를 그리면 유화처럼 보인단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를 쓰면 소설 같고 소설을 쓰면 소설이 아니라 시 같다는. 문득 그 오래전 일이 생각나 나는 아무도 모르게 쿡쿡 쓰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을 피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림을 그리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성싶다.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건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라는 것을 이제 비로소 경험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아무려나 이즈음 내 생의 유일한 즐거움은 일주일에 두 번씩 칠월미술학원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장편 연재를 하느라 봄 내내 화실을 못 나가고 있었을 적에도 나는 내가 그리다말고 온 서툰 그림과 칠월미술학원이 그리웠었다. 아마 다음달부턴 유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칠월미술학원은 논현동 낡은 건물 삼층에 있다. 수강료는 십만원. 칠월미술학원에는 전화가 없다. 아니, 칠월미술학원이 아니라 사월미술학원인가? 아니면 팔월미술학원?

* 소설가 조경란은 소설집·장편소설로 <<불란서 안경원>>,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나의 자줏빛 소파>> 등을 펴냈다.
(200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