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이름, 이름들 |김태환|

–외국어 이름의 수용 문제
외국의 이름이 수용되면서 발음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Smith’란 이름을 ‘스미스’라고 읽을 때,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게 이름을 왜곡, 변형시키는 것이다. 똑같은 일들이 전세계에서 늘 일어나고 있다. 미국인들이 외국의 이름을 마음대로 미국화시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래서 독일의 ‘키징어’는 ‘키신저’ 장관이 됐고, 오스트리아의 촌놈 ‘슈바르체네거(Schwarzenegger)’는 미국에 건너가 ‘슈와르제네거’로 출세했으며, 이스라엘의 전수상 ‘벤야민 네탄야후’는 CNN에 등장할 때는 항상 ‘벤자민 네탄야후’가 된다. ‘지저스’란 것도 결국은 예수 이름의 오독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산 ‘콜게이트’ 치약이 독일에서는 ‘콜가아테’ 치약으로 돌변하고, ‘김정일’은 ‘김영일’로, ‘쥬도(柔道, Judo)’는 ‘유도’로 바뀐다. 심지어 ‘폼 프리트(pommes frites: 감자 튀김)’에서 뒤의 es가 묵음인 줄 모르고 ‘폼메스(Pommes)’라고 말하는 “무식한” 독일인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지명이나 국명일수록 원어 이름과 외국에서 불리는 이름 사이의 격차가 심하다. 예컨대 독일의 도시 ‘쾰른’은 프랑스어로 ‘콜로뉴(Cologne)’이고,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밀랑'(佛), ‘밀란'(英), ‘마일란트'(獨), ‘베네치아’는 ‘브니즈'(佛), ‘베니스'(英), ‘베네디히'(獨)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이 한중일 삼국에서 제각기 다르게 읽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지명의 전파와 변화 과정, 원명과 외국어명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외국어명은 원명의 더 오래된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예컨대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어식 발음인데, 이 차이는 이탈리아어에서 일어난 [l]음의 [i]음으로의 전이가 영어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관계도 그 속에 반영된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리아나’의 독일어명은 ‘라이바하’이다. 그런데 이런 독일어식 지명은 제국주의적 냄새를 너무 풍기기 때문에(류블리아나는 옛날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시였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라이바하’ 대신 ‘류블리아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점점 일반적인 추세가 되고 있다.
지명이 중간에 또 다른 나라를 거쳐서 수입되는 사례들도 있다. ‘쾰른’의 불어 표기(Cologne)가 영어에서도 통용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일 터이다. 물론 여기서 또 한 차례의 변형이 일어나기는 하지만(더 이상 ‘콜로뉴’가 아니라 ‘컬로운’이다). 강대국의 영향을 끊임 없이 받아온 우리 나라의 경우에 간접 수용 현상은 특히 두드러진다. 우리말에서 ‘고뿌’가 ‘컵’이 되고, ‘란닝구’가 ‘런닝’이 되고, ‘마카사’가 ‘맥아더’로 바뀐 과정에는 일본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미국을 통한 영어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간 우리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영어권 바깥 세계의 많은 지명이나 인명들은 대개 영어를 통해서 받아들여졌다. ‘비엔나'(Wien→Vienna), ‘베니스'(Venezia→Venice), ‘솔티'(이것은 영어식 발음을 따른 것이다. 그의 모국인 헝가리식 발음은 숄티이다), ‘에베레스트'(초모룽마→Everest) 등등, 그 예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간접 수용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가급적이면 원어를 직접 우리말화시킨다는 원칙이 대세가 되었다. 그 결과 ‘불란서’보다는 ‘프랑스’, ‘비엔나’보다는 ‘빈’, ‘플로렌스’보다는 ‘피렌체’가 더 정확한 표기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일한 대상이 두가지 상이한 이름을 가지게 되는 현상이 생겨난다. 새로운 표준을 정한다고 이미 상당히 관습화된 명칭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이제와서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나 개인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빈 대사관’보다는 ‘비엔나 대사관’이 더 알기 쉬워 보인다. 이렇게 하나의 장소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데서 혼란이 생겨난다. 나는 자기 딸이 ‘불란서’에 갔다 왔지 ‘프랑스’에는 가지 않았다고 우기는 어떤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자기가 전공한 언어에서 사용되는 명칭을 우리말에 생각 없이 함부로 도입하는 서양어문학 전공자들의 무분별이다. 불문학 전공자가 ‘로버트 무질’을 ‘로베르 뮤질’이라고 부르고 ‘장 파울’을 ‘장 뽈’이라고 쓴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수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를 ‘떼제’로, ‘이오카스테’를 ‘죠카스타’로, ‘호라티우스’를 ‘호라스’ 또는 ‘호라쯔’로, ‘바이에른’을 ‘바바리아’로 바꿔버리는 것은 지나친 ‘전공어 중심주의’가 아닐까.
심지어 사전에서조차 이런 ‘전공어 중심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다. 어느 독일어 사전에서 ‘Bohmen’이라는 항목을 본다. ‘뵈메’ 지방을 가리킨다고 한다. 반면 불어 및 영어 사전의 해당 항목(Boheme; Bohemia)에서는 ‘보헤미아’ 지방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아무리 독일어가 좋고 입에 익숙하다 해도, 우리나라 말로 ‘보헤미아’는 ‘보헤미아’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독일어 사전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이런 사전으로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모두 ‘뵈메’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애꿎은 일반 독자들은 ‘보헤미아’ 지방과는 다른 ‘뵈메’라는 지역이 또 어딘가 있구나 하고 상상할 것이다.
‘전공어 중심주의’는 서양의 주요 언어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어·불어·독어는 우월한 언어이고,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표준이다, 이들 언어로 쓰여진 글은 옳을 것이다, 대강 이런 식의 생각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예전에 어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서울대 수석 합격자 모군은 고등학교 재학중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영어 원서로 읽었다.” 어떻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중에 영어로 된 원서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번역서가 원서로 둔갑한 것은 영어로 된 모든 책은 원서이고 정본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일본어에 능숙한 일문학자가 ‘무질’을 ‘무지루’라고, ‘에디슨’을 ‘에지송’이라고 번역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일어 원서”라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일어가 표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일본어 전공자들조차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어뿐만 아니라 그 어떤 언어도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일본어가 외국의 지명과 인명을 자기 식대로 변형시키듯이, 영어·불어·독어에서도 마찬가지 변형과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말 속에서 외국의 이름들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것은 필연적인 언어의 법칙이다. 이러한 왜곡과 변형 속에는 우리가 외국과 접촉해온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의 이름에 대해 영어식, 독어식, 불어식 이름이 함께 수용되고 공존하는 것도 우리 문화사의 한 측면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나름의 표준을 세우는 문제에 대한 좀더 뚜렷한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기가 전공한 말을 너무 신주단지처럼 모시지 말고, 그 속에도 무수한 오해와 오독과 왜곡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우리말의 맥락 속에서 주요 인명과 지명의 표준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두 가지다. 독일인의 이름은 독일에서의 발음을 따른다는 원어 우선의 원칙과 정착된 관습을 존중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원어를 존중한다고 ‘오스트리아’를 ‘외스터라이히’로 바꿀 필요는 없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 당연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 데서 ‘뵈메’와 ‘보헤미아’가, ‘바이에른’과 ‘바바리아’가, ‘로만어’와 ‘로망스어’가 나란히 사용되는 혼란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런 혼란상에 저항하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우리말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해본다.

* 비평가 김태환은 <이아기꾼의 자의식–<<한없이 낮은 숨결>>론> 등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으며, 페터 지마의 <<비판적 문학 이론과 미학>> 등 여러 번역서도 펴냈다
(20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