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황순원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홍성원|

며칠 전 한국 문단의 큰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다. 장지에서 선생님의 하관을 지켜보며 유택 너머로 언뜻 본 그날의 가을 하늘은 온통 눈이 빨려들듯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 그 어른 떠난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은, 잡석 투성이의 척박한 한국 문단에서 그 어른이 걸어온 길이 참으로 곧고 간명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선택한 고단하고 가난한 작가의 길을 그 어른은 평생 허튼 몸가짐 한번 없이 늘 단정한 모습으로 청결하게 살다 가셨다. 정보의 홍수와 이 광란의 속도 시대에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걷는다는 것은 그 성실한 직심(直心) 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가끔 찾아 뵙던 생전의 그 어른 앞에서는 우리는 왜 늘 그렇게 부끄럽고 왜소했는지 모른다. 온갖 탐욕으로 흉하게 일그러진 우리의 몰골을, 그 어른의 단아한 몸가짐이 무언으로 꾸짖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찾아 뵙고 우리의 남루한 삶을 부끄럽지 않게 꾸려갈지 막막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에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 잘난 사람과 전문가와 대가와 천재는 많은데, 영악하고 사나워진 우리의 이기심을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로 타일러주는 존경스러운 어른이 없다. 눈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돈벌이에만 미처 돌아가는 이 시대가 깊은 혜안의 큰 어른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끼니를 거를 만큼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마음만은 외롭지 않은 행복한 시대를 산 적이 있다. 영국의 버틀란드 러셀과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 같은 당대의 지적 거인들이 우리의 영혼 가까이에 큰어른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들이 살고있는 영국의 외진 연구실에서, 알제리의 한적한 시골 카페에서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낮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헝클어진 우리들의 자세를 조용히 꾸짖거나 타이르거나 바로잡아 주곤 했다. 가끔 들려오는 그들의 맑은 목소리는 화려하거나 기발하지 않고 오히려 밋밋하거나 일상의 말들처럼 평범했다. 그러나 제대로 귀가 열린 사람들은 그들의 말이 함축한 의미를,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런 말이 필요했는가를, 잃어버린 친구를 찾듯 한참 후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잠언으로 되새기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가고 세상에는 우리의 잘못이나 실수를 타이르는 진정한 어른이 없다. 보이느니 온통 벤처기업의 천재, 신지식의 대가, 재테크의 귀재, 스포츠 영웅들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영원한 화두다. 빵으로 산다는 대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있다. 그 답을 얻어내기 위해 사회주의는 엄청난 노고와 많은 양의 피를 흘렸고, 그 답이 얻어진 후에는 무대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그 텅 빈 무대는 지금 야바위와 파렴치와 도둑이 들끓는 자본주의의 독무대가 되어있다.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여 지금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돈벌이에 뛰어들고 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이제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 가장 개인적인 은밀한 미덕중의 하나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한 세상이 된 것이다.
주식 폭락을 알리는 텔레비젼 뉴스를 들으며 나는 문득 카뮈가 남긴 화두 하나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재산을 얻자마자 홀연히 사라지는 자유…” 어느새 우리의 소중한 영혼은 돈의 무게에 짓눌려 자유를 잃고있다. 사람이 타락하여 망가지는 과정은 경제학자나 전자공학박사의 미시적 안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삶이 단색으로 분해되지 않고 외가닥 단선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에 사는 수 십억 인구의 숫자만큼 사람들은 개개인이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채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 무수한 서로 다른 삶들이 물질적 경제적 충족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애써 철학을 공부하고 소설을 읽고 역사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화두다. 그 동안 이 세상은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균형 잡힌 노력과 공덕을 쌓지 않았다. 무수한 삶의 무늬를 대충이나마 어림짐작하기 위해서는 울고 웃고 탄식하고 아파하는 사람의 총체적 삶이 그물에 잡혀야한다. 그 그물의 얼개는 많은 사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높은 지성으로 여과된 겹눈의 혜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겹눈의 혜안을 정한하게 키우는 것은 지금 한창 홀대와 멸시를 받고있는 철학과 문학 역사 같은 인문학을 통해서다.
“재산을 얻자마자 홀연히 사라지는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내 나이 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길쭉한 얼굴의 카뮈라는 프랑스 소설가는 아직도 내게는 잊지 못할 큰 스승이고 어른이다.
우리의 궁핍한 영혼을 위해 큰 어른의 다정한 목소리가 절실하게 그리운 이즈음이다.
우리 문단의 큰 어른이셨던 황순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 소설가 홍성원은 <<디데이의 병촌>> 이후, <<남과 북>> <<먼동>> 등의 대하소설 및 장편 소설들과, <<흔들리는 땅>> <<폭군>> <<주말 여행>> 등의 소설집을 펴냈다.
(200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