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우찬제|

간혹 문학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한다며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지를 물어온다. 매우 기쁘면서도 난감한 순간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진지하게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서는 젊은 인문주의자의 가상한 열정이 나를 기쁘게 한다. 하지만 문학 공부의 어려움과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면 썩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보니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게 된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들이 필요로 할 것 같은 정보만 내어주곤 서둘러 만남을 끝내려 하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중 한 명에게 불쑥 이런 얘기를 했다. 현실에서 보상을 찾으려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문학 공부를 시작하라고 말이다. 문학 공부는 현실에서 그 어떤 보상도 찾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한심한 영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친 김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얘기를 덧붙인다. “염소와 다를 바 없는 이 한심한 영혼아, 너는 굶주렸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와 빵을 먹는 대신에 하얀 종이를 꺼내서 ‘포도주·고기·빵’이라 써놓고는 그 종이를 먹는구나.”
젊은 영혼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심한 영혼?”, “한심한 영혼!” 하더니 조금은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낯빛에 겨우 안심이 된다. 한심한 영혼이 될 가능성이 있구나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그 젊은 영혼이 다소 측은해 보여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예전에 어느 결혼식장에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 주례를 맡으셨는데……”
주례사의 초입에서 그분은, 흔히 부부를 일컬어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이 말처럼 거짓말인 것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철저하게 이심이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사실을 빨리 수긍해야 지혜로운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심이체일 수밖에 없는 현존재를 일심동체로 만들기 위해 서로 마음을 비우고 노력하는 과정이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아닐까. 현실적 보상이 아예 없다기보다는, 바라지 않는 쪽이 진실하게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소리지. 그만큼 절실해야 위기에 빠진 인문학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가 “보상이란 생각을 아예 마음 속에서 없애 버릴 것. 정신에 대한 커다란 장애가 거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좀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디를 가나 한가지다. 온통 보상을 바라는 마음들로 들끓고 있으니 말이다. 이 마음들이 우리 존재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만든다. 권력 있는 자 권력으로, 금력 있는 자 금력으로 자기를 살찌워 폭발 직전의 과포화 상태로 치닫는다. 그것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면 작금의 온갖 비리 사건과 같이 ‘이름’을 얻는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50년대의 시인 송욱은 이렇게 풍자한 바 있다. “청계천변 작부를 / 한아름 안아 보듯 / 치정 같은 정치가 / 상식이 병인양하여 / 포주나 아내나 / 빛과 살붙이와 /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 다달은 낭떠러지!”(<하여지향 5>)
‘치정같은 정치’나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은 우리를 너무나 무겁게 만든다. 이렇게 우리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울 때, 낭떠러지로의 추락만이 있을 뿐, 새의 비상을 알지 못한다. 가벼워져야겠다. 좀 비워야겠다. 그러니 젊은 영혼이여, 이제 우리는 ‘한심한 영혼’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한심한 영혼이길 바랬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스스로 남겼다는 묘비명이 미케네 섬에 있는 그의 무덤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이제 젊은 영혼은 고개를 제법 절실하게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나는 얼마 전 계룡산에 가서 보았던 판화 그림 속의 한 글 줄기를 들려준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 젊은 영혼의 눈빛 사이로 파랑새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 서강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비평가 우찬제는 평론집으로 <<욕망의 시학>> <<타자의 목소리>>를 펴냈다.
(200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