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앉아서 걸어가기 |김광규|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득한 옛날의 중국 시를 모은 <<시경>>을 읽어보면, 번역을 거친 것인데도, 이해할 수 없는 시는 한편도 없다. 제사의 노래, 궁중의 노래, 민중의 노래, 가리지 않고, 읊기 좋은 언어에 인간의 생활과 정서가 담겨 있다. 운문으로 씌어졌던 서양의 고대 비극이나 중세 문학 작품들도 시공을 초월하여 읽히는 보편적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초엽부터 독일 문학에는 보통 사람의 이해를 거부하는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표현주의 작가들 외에도,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설가 프란쯔 카프카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은 단순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전문적인 문학자나 비평가의 해설을 요구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살아 생전에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위대한 작가들이 사후에 후세의 학자와 비평가와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아이러니를 낳게 했다.
독문학을 생업으로 삼는 나도 이러한 아이러니의 올무에 걸려든 경우라 할 수 있다. 대학 초년생 시절에 릴케의 후기시 강의를 들었는데, 주해가 없이는 한 구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을날> 같은 릴케의 초기시를 애송했던 문학 청년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문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바로 이처럼 난해한 작품을 해석하는 작업 아닌가 하는 다못 도전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독일어 해독 능력도 빈약했던 학부 시절에 대뜸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 덤벼들었고, 대학원에서는 카프카에 매달려 4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 때 누군가 말렸더라면, 나의 문학 여정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는 외국어문학부에도 외국인 강사가 드물었으므로, 해당 외국어를 일상의 구어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독일에 유학하여 비로소 문어가 아닌 구어로서의 독일어를 배웠고, 동시대의 현역 작가들 작품을 읽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존했던 귄터 아이히의 전후 서정시로부터 시작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정치시를 거쳐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참여시에 이르기까지 세기를 역류하는 순서로 독일시를 섭렵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독일 문학이 결코 추상적이고 난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비의적 서정시와 난해한 소설만을 주로 읽었던 한국 학생으로서는 그것이 하나의 개안이었던 것이다.
귀국 후 아이히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끝내고, 브레히트와 하이네의 중요시를 골라서 번역 시집을 출판했다.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현실 참여 문학을 대표하는 하이네(1797-1856)와 브레히트(1898-1956)는 꼭 100년 차이를 두고 자기 세기의 전반기를 살고 갔다. 자기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두 작가는 새롭고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성취했다. 단아한 시어, 시적 은유와 암시, 애매모호한 발언 대신, 대담한 일상어, 산문적 직접성, 현실의 풍자와 고발을 과감히 도입함으로써, 시의 형태 속에 삶의 현실과 꿈의 이상에 대한 시인의 진솔한 느낌과 생각을 은폐하지 않고 개진하려고 했다.
동시대의 독자로부터 찬양과 배격을 한꺼번에 받은 바 있는 두 시인은 그러나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지속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가 1975년에 우리말로 옮긴 하이네 시선집 <<로렐라이>>와 1985년에 펴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른바 스테디 셀러로 서점의 일각을 차지했고, 후자의 경우 포스트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어느 젊은 작가가 그 제목을 자기 작품에 차용한 바 있다.
문학도라는 통칭 개념에는 넓은 의미에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와 문학 작품을 연구하는 학자가 함께 포함된다. 이 두 가지를 겸업하고 있는 나에게는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글쓰기의 간접적 지표가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 문학을 따로 공부하거나 문예창작과에서 글쓰기를 일삼아 배운 적 없이, 혼자서 남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는 문학 수업을 했던 셈이다. 돌이켜 보면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서도 내 나름대로 엄격한 언어의 형식을 배웠던 것 같고, 카프카의 부조리한 소설에서도 내용과는 달리 즉물적이고 정확한 문장을 통하여 내 나름대로 서술의 명징성을 배웠던 것이다.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이 반면교사로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무책임한 시적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고 독자의 이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창작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시문학의 자장에는 한국의 전통시, 독일의 참여시, 프랑스의 순수시 등이 제 각기 양극(+)과 음극(-)을 지닌 채 상호 작용을 하며 공존하므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자기의 취향에 따른 호오는 있겠지만, 문학의 우열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문학 작품 심사를 하게되면 서로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심사위원들이 같은 작품을 고르는 수가 많다. 가장 주관적인 문학 장르인 시에도 평가의 객관적 척도가 잠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객관성이 문학의 해석과 수용에 작용하여 시공을 초월하는 작품을 가려내는 것 아닐까. 글쓰기에도 주관적 열정 못지 않게 객관적 지성이 필요한 것이다.

*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광규 시인은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부터 <<물길>> <<가지 것 하나도 없지만>>에 이르는 7권의 시집을 펴냈다.
(200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