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역(役)과 고(孤) |박철화|

어디에 가서 물어보나 내 삶에는 ‘역(役)’이 있다고 한다. 내 스스로 물어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나는 늘 이 소리를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이 소리가 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혀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먼나라에까지 가서 몇 년씩 돌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태어난 땅이 작아서 그런 줄 알았다. 내 고향은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산골의 작은 도시이다. 태어나고 자란 집은 내 삶의 맨앞 25년 동안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있던 길은 나중에도 그대로였고, 몇몇 친구가 타지(他地)로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저 산 너머에는, 그리고 이 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늘 궁금했고, 그곳을 향해 떠나고 싶었다.
중학교 때부터 틈틈이 자행되던 나의 서울행(行)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번져 있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거의 예외 없이 춘천과 서울을 잇는 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곤 했다. 가파른 산언덕을 넘고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땀방울을 식히는 일만이 아직은 떠날 수 없는 내 삶의 미숙한 나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고 싶은 그 조갈증 사이의 거리를 버티게 해준 것이다. 나는 그 작은 도시를 미치도록 떠나고 싶었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와서도 내 마음은 늘 바깥을 맴돌았다. 서울의 한구석에 처박힌, 그나마 산에 둘러싸여 있는 학교는 전혀 마음의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저 바깥에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터인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패가망신할 맹목의 연애를 하면서도 좁은 곳에 갇혀 있다는 갑갑함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얻고 싶었으나 그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면, 그 천하를 주유(周遊)라도 해야 하는 것.
내 청춘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자락에 위치한 한 도시로 옮아간 것은 스물 일곱 살의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땅이 아주 작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다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물인 나에게는 떠나는 일만이 진리의 보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쫓듯 운명의 소리를 뒤쫓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처음의 낯설음이 지나자 나는 또 어디론가 가지 못해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늙은 대륙 유럽을 한동안 미친 듯이 떠돌아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북아메리카에 건너가 이 도시 저 도시로 한 달 넘게 무작정 돌아다니던 어느 날 비로소 나는 ‘역’이라는 내 운명을 떠올리게 되었다. 1997년 초가을 도착지이자 출발지인 몬트리올의 프렌 쿼터, ‘Jazzons’이라는 이름의 생음악 카페에서 저녁이면 병맥주를 하나 사들고 재즈 연주를 들으며, 내 삶을 이끌고 온 것은 바로 그 ‘역’이라는 사실을 반복되는 리듬처럼 아프게 씹고 또 씹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역’ 바로 옆에 늘 ‘고(孤)’가 있었다는 것을. 물어본 사람마다 ‘역’과 ‘고’를 이야기했던 것을. 나 자신도 모르게 운명에 이끌려 떠돌아다니는 사이,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여인들에게 무심함의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역’이라는 내 운명에 휘둘린 사이의 무심함이 ‘고’를 낳은 것이다. 카페 바깥의 테이블에서 문득 취한 고개를 들면 건너편 내 호텔 숙소의 불꺼진 창만 이리 저리로 흔들렸다. 캄캄한 어둠 말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 나는 5년을 넘게 지낸 파리로 돌아가 아무런 미련 없이 짐을 꾸렸다. 어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내 얼굴이 보이니, 그 캄캄한 어둠이 내 생이니, 이제 더 이상 어떤 공간을 찾아 떠돌겠는가? 사실은 그 어둠이란 다름 아닌 내 존재의 저 깊숙한 안자락이라는 것을 서른이 한참 넘고서야 간신히 알게된 것이다. 내 청춘의 막막한 어둠은 바로 ‘나’라는 우주의 공간이었던 것.
그래서 이제 나는 자주 내 안의 어둠 속으로 길을 떠난다. 바깥에서 찾았던 내 많지 않은 지식의 그 너머에 있을 지혜를 찾아. 그런데 얼마나 어둠을 헤매어야 내 생은 마침내 열릴 빛의 한자락이라도 볼 것인가, 그때에도 여전히 내 삶은 ‘역’과 ‘고’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생의 반 자락을 더 돌아온 지금에도 의지와 운명과의 불가해한 엇갈림을 두려워하고 있는 나에게 그 빛은 정말 있을 것인가?

* 평론가 박철화는 평론집 <<감각의 실존>> 외에, 여러 번역서들을 펴냈다.
(200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