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친 다음 |이진명|

시를 쓰려는 중이었다
‘그친 사람들’ 이라는 제목만 간신히
백지 맨 위쪽에 박아놓고
얼마나한 시간이 흘렀을까

그쳤다. 뚝 그쳤다
보일러가 마침내 그쳤다
동시에 감전처럼
소름이 돋는
고요의 인산인해
뒷걸음질쳐졌다

보일러 가동중일 때를
굳이 소음이라 못 견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금 그친 보일러 소리에
인산인해 쏟아져들어온 이 고요의 군대는
너무 낯설구나
두 귀가 빳빳해지도록

나는 이 세상을 ‘그친 사람들’
말하자면, 죽음
또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 쓰려는 중이었다

울음울기를 그친 다음엔
밥 먹기를, 약 먹기를 그친 다음엔
어떠한가
네 바퀴에 체인을 감고
눈보라 강원도 대관령길 넘기를 그친 다음엔
도대체 어떠한가

쉼인가, 원하던 바로 그 쉼인가
그런 걸 물으려는 중이었는데
첫마디 묻기도 전
無鐵砲 고요의 군대가 단박에 입을 막았다

* 이진명 시인은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를 펴냈다.
(200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