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는 아이 |박혜경|

가을 저녁, 마른 먼지 냄새 나는 싸늘한 바람이 한줄기 코끝을 스쳐갈 때, 혹은 어두워지는 청동빛 하늘 속으로 검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겨울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시간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아득한 기억의 한자락이 문득 우리의 마음 속에서 소리없이 펄럭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아주 짧은 순간 우리의 마음을 스치고 사라지는 과거형의 문장들, 그 덧없이 스쳐가는 시간의 둥지는 어디일까?
어둑신한 박명(薄明)의 기억 속을 잘게 부서진 어지러운 퍼즐 조각들처럼 부유하는 그 과거형의 문장들을 따라가노라면 오래된 기억의 지층 밑에서 꺼칠하고 열에 뜬 얼굴로 한밤중의 시간 속에 엎드려 어설픈 문자들을 끼워맞추고 있는 한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상처와 갈망이 뒤범벅된 얼굴로, 어깨를 가슴 안쪽으로 잔뜩 옹송그린 채 불안한 눈동자를 뒤룩거리면서 그 아이는 푸른 색으로 바뀔 가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건널목 이편의 붉은 신호등 앞에 언제까지나 서 있는 것이다.
사적인 얘기가 허용된다면, 그 때의 나에게 문학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출구처럼 보였다. 어떤 존재의 잉여감이라고 할까, 존재에 대한 부채 의식이라고 할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시달리던 그 당시 문학은 나에게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서 무언가 쓸모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보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오래 전 내가 김현 선생님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는 것이다”라는 말을 처음 만났을 때의 반가움 속에는, 아마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으로 깜깜하기만 했던 20대 때의 내 실존의 어떤 절박함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내게는 그 존재의 잉여감이란 것이 여전히 의식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어 어떤 자리에 가서도 내가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어딘가로 숨어버리거나 빨리 도망쳐나오고 싶은 조바심으로 마음이 한없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어쩌면 특정한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이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저울질해보고 그것을 확인받고자 하는 앙앙불락(怏怏不樂)의 연속인 것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시인의 말을 빌자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불안이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만큼 불안과 더불어 기우뚱기우뚱 하면서 아슬아슬한 삶을 이끌어오다보니 이제는 이 불안이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동안은(아니, 사실은 지금도) 마음의 휴식이라고는 없는 이 삶의 고단함과 누추함이 견딜 수 없게 버거워서, 정말 관뚜껑에 탕탕 못박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휴, 이제야 편히 쉴 수 있겠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누구 말대로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고통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그 고통을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끊임없이 나를 마음의 한대(寒帶)로 몰아넣는 이 불안이 없었다면 내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지금까지 이 정도만이라도 가동시켜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쓰기가 나를 불안의 고삐로 비끄러매기도 하지만, 또 그 불안이 나를 쓰고 싶은 욕망쪽으로 밀어붙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다 비평이라는 글쓰기 속에 몸을 담고 말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 되었든 지금까지 글쓰기란 내게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그 앙앙불락의 한 표현이 아니었던가 싶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고 싶은, 그러면서도 또 끊임없이 세상과의 소통을 갈망하는 이율배반 속에서 기억의 지층 속에 엎드려 있는 그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건널목 저편의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인 비평가 박혜경은 <<비평 속에서의 꿈꾸기>> <<상처와 응시>> <<세기말의 서정성>> 등의 평론집을 펴냈다.
(2001.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