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쌔끈이는 어디서 왔을까? |정과리 |

괴리씨의 요즘 고민거리는 ‘쌔끈은 어디에서 왔는가’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 ‘어!’ 혹은 ‘사랑해!’ 만큼이나 친숙하게 쓰는 모양인데 괴리씨는 이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이다. 평소에 어휘력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의 보유자인 괴리씨는 심장의 오른쪽 언저리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심장인 자존심이 구겨지는, 아니 ‘부억’ 찢기는 소리를 들으며 방금 그 단어를 발음한 여성에게 물어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니?” 그랬더니 여성도 당황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게… 그게… 그냥… 멋있다는 뜻일 걸?” 괴리씨는 자존심의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을 순간 맛보고는, 평소의 성격대로 거의 물욕에 가까운 궁금증에 사로잡혀서 재차 다그치듯 물어 보았다. “멋있다라고 하지 않고 쌔끈하다라고 한 이유는 뭐냐?” 쌔끈의 단어를 그토록 재빨리, 그렇게 발랄하게 발음했던 것으로 보아 반벙어리나 말더듬이가 아닌 것은 분명한 이 여성이 생각을 짜내느라고 띄엄띄엄 그리고 주눅이 잔뜩 들어서 떠듬떠듬 대략 5분간에 걸쳐서 설명한 바를 요약하자면 ‘쌔끈’이란 “약간 건방지면서도 멋있는 사람” 혹은 “무언가 불온하면서도 멋있는 광경”을 가리킬 때 쓰인다는 것이었다. 아하! 그제서야 괴리씨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이런 거 아닌가? 오래전부터 유행하는 말 중의 하나인 ‘짱’의 뜻이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동렬의 사람”을 일컫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젊은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그런 모순된 상태나 상황에 대한 동경 혹은 애착이 유별난 것이다.
이해를 한 김에 괴리씨가 그의 어설픈 사회학을 더 연장시켜보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행보라고 할 만 하였다. 저 모순된 상황에 대한 동경은 어떤 사회적 욕망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 욕망의 태반은 무엇인가? 그러나 괴리씨의 생각길은 그만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사회학으로 들어가기 전에 언어학집 주모가 밀린 외상값을 갚으라고 소매를 잡아당겼던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쌔끈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생경해서 어떻게 만들어졌나, 하는 호기심이 맹렬히 일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기발한 신조어라도 그냥 생기지는 않는 법이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의 신조어의 상당수는 채팅 문화에서 생긴 것이라서 기왕의 말을 줄여 쓴 것들이다. ‘번개’하면 ‘번개 모임’의 준 말이고, 번개 모임이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순식간에 결정해서 재빨리 만나서 노닥거리다가 미련없이 헤어지는 모임이란 뜻을 가진다. 또는 ‘재섭써’는 ‘재수 없어’를 발음 나는 대로 줄여서 쓴 것이다. 언어 사용의 제1원칙이 경제성에 있는 만큼 이러한 말줄임 현상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조어에 줄임말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요즘 와서 조금 달라진 양상은 단어를 비틀어서 특이한 정서를 싣는 것이다. 가령, ‘선생님 잘있어여?’ 같은 데서 보이는 ‘-어’화 현상은 본래의 말에 가벼운 불량기를 실은 것이다. “아저띠가 용돈줄께”에서 보이는 유아식 발음이 뜻하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때 노인네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당근이지’는 ‘당연하지’라는 추상적인 말에 당근의 물질성을 부여하여 독특한 실감이 나도록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부모없는 자식이 없듯이 뿌리 없는 단어란 없는 것이다.
한데, 이 쌔끈이라는 단어만은 괴리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시 알 수가 없었다. 괴리씨는 이 말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구글(Google)엔진으로 뒤졌더니 무려 81개의 사이트가 검색되었다. 뭐라고 써 있나 어디 보자. “쌔끈 사이트 오픈” “길드 최강!!! 쌔끈 길드”, “쌔끈 김회장”, “연대 생명공 쌔끈 96학번”, “윤이병의 늠름한 모습!!! 쌔끈 윤이병” 이것들을 보니 ‘쌔끈’은 분명히 형용사로서 멋있다는 종래의 형용사를 밀어내기 위해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포되고 전염되고 있는 새로운 단어 바이러스임에 틀림없었다. “쌔끈 젝스 쉐이징 크레이지 에미나이 요미얌~!” 자지러지는 비명 같은 이 말은 문법적으로 맞는 데는 하나도 없지만, 단어 하나하나는, ‘쌔끈’만 빼고는, 이해 못할 것이 없었다. “존나 쌔끈!!! 뽀대짱!!”. 이 말도 상스러워서 풀이는 생략하겠지만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쌔끈’만 빼고는 말이다. 그러니까 ‘쌔끈’은 분명히 정상적인 단어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쌔끈’의 부모를 찾은 건 아니었다. 쌔끈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혹시 ‘세련’이라는 말에서 왔을까? 오늘날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멋있다’의 사회적 의미와 가장 잘 부응하는 한자어는 ‘세련’이니까 말이다(옛날에는 투박한 것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요즘은 멸종된 듯 하다.) 그런데 왜 ‘세’가 “쌔”로 바뀌었을까? 된소리야 감정을 강조하려다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칠 수 있지만, 왜 ‘ㅔ’가 ‘ㅐ’로 바뀌었을까? 혹시 요즘 젊은이들이 워낙 책을 읽지 않다 보니, 열리고 닫히는 이런 까다로운 모음 구별은 아예 무시하고 사나? 게다가 저 ‘끈’은 또 무엇이지? 어디에서 끈이 떨어져서 ‘쌔’에 도깨비풀처럼 철썩 달라붙었나?
“구하라, 구해질 것이다”는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괴리씨가 저 후레아들같은 단어의 비밀을 안 것은 안광이 면배를 철할 만큼 눈을 도스르고 쳐다보길 무려 한 나절, 앞산이 첩첩하듯 뻘개진 눈이 칩칩하고 아릴 때쯤이었다. 에고 눈 아파라, 하면서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잠시 전에 본 이런 말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따끈따끈 쌔끈”, “쌔끈 화끈 이벤트” 아하! 문득 괴리씨는 돈오의 희열에 휩싸였으니 ‘쌔끈’의 ‘끈’이 ‘따끈따끈’의 ‘끈’이나 ‘화끈’의 그것과 같은 글자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끈’자로 끝나는 말이 뭐가 있을꼬 하고 찾아보니, ‘매끈하다’의 ‘매끈’, ‘미끈거리다’의 ‘미끈’, ‘발끈 화를 내다’의 ‘발끈’, ‘머리가 지끈거리다’의 ‘지끈’, ‘끈끈하다’의 ‘끈끈’, ‘희끈거리다'(어질증이 나서 자꾸 어뜩어뜩하여지다)의 ‘희끈’, 그리고 ‘타끈하다'(인색하고 욕심이 많다)의 ‘타끈’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의미가 제각각이고 따라서 당연히 어원적으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글자 ‘끈’이 별도의 의미소를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새끈’이라는 단어의 탄생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따끈’이거나 ‘화끈’이며, 이 단어들이 가진 정서적 밀도의 강렬함과 풍요함이 ‘끈’이라는 글자에 집중된 채로 떨어져 나가 ‘세련되다’에 붙은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세련되다(= 세+련되다) –(압축)–> 세 * 2 –> 쎄 –(이동)–> 쌔
화끈하다(=화+끈[하다]) –(압축)–> 끈
쌔+끈 –(결합)–> 쌔끈
괴리씨의 이 유추가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괴리씨의 종주먹만한 두개골로는 이밖에 달리 유추해볼 어떤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이걸 믿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자고 생각해보니, 이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해 결합 법칙은 한국어의 문법적 틀(의미론적이든, 통사론적이든)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송성문씨의 ‘정통영어’같은 정통 문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고 언어사회학 혹은 언어문화학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화끈’의 ‘끈’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의미소를 이루어 다른 글자와 결합한단 말인가?
아하, 요즘의 젊은이들은 뿌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적 현상들뿐이로구나. 아니, 이 현상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걸 보니, 그냥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들은 본래의 뿌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스스로의 유희 본능에 따라 현상으로부터 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뿌리가 먼저 있고 가지가 다음에 있는 게 아니라, 가지가 먼저 있고 뿌리가 그로부터 태어나서 다시 더 많은 가지를 뻗어내는 촉매로 쓰이는 것이다. 인간을 기계와 결합시켜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만들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뿌리찾기, 아니 뿌리만들기 현상은 사회학적인 탐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언어 놀이란 어떤 사회적 욕망을 구성하고 있는가? 그것의 태반은 무엇인가? 괴리씨가 언어학집에서 날품을 판 끝에 겨우 풀려나왔을 때 이미 괴리씨는 너무도 피곤하여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쩔 것인가? 새털같이 많은 내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튼 괴리씨의 이 괴상한 단어찾기 고역은 끝이 났다. 그런데도 괴리씨는 찜찜하다. 왜냐하면, 괴리씨의 유추는 언어 사실들의 기본적 규칙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자의성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호의 근본 성격이 자의적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괴리씨는 자꾸만 궁금한 것이다. 괴리씨에게 궁금증이란 아주 치명적인 숙환인 것이다. 더욱이 괴리씨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문제에 궁금의 거머리가 붙었으니, 자칫 이것이 그의 피골을 다 빨아먹어 괴리씨를 장기 치료를 요하는 괴혈병 환자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괴리씨의 마지막 비명. 쌔끈이를 만드신 분들, 누가 나 좀 도와줘요!

* 연세대 국문과 교수이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인 평론가 정과리는 <<스밈과 짜임>> <<무덤 속의 마젤란>> 등의 평론집과 문학과 관련된 여러 편서를 펴냈다.
(200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