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낯선 시간 속으로>를 프랑스어로 옮기며 | 최애영 |

이인성을 번역하면서 느낀 소감을 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조금은 난감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을 불어로 옮기면서 “Ah, le cochon!” 하고 외치면서 책상을 두드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그의 작품에 대한 나의 애정이 거의 증오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만큼 나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내내 그것과 질퍽한 애증의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작품, 번역이 가능해?”라는 농담 투의 질문을 이따금씩 받기도 했다. 물론 이인성의 작품이 번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작품 속에 담겨있는 생각과 감정의 뒤틀림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왜 그가 산문을 쓸 때처럼 소설을 쓰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의 산문은 너무도 고전적이어서 맛이 없다. 솔직히, 그의 작품 속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그 많은 질문들, 그것도 그토록 꼬이고 뒤틀린 문장들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그 질문들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한다. 그러나 마땅한 표현이 없어 괴로워하는 질문들의 우글거림 때문에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그러한 그의 작가 정신을 불어 속에 온전하게 옮길 수 있기를 희망했다.
처음부터 공역자와 나는 각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한편으로는 텍스트의 원래 모습을 공역자에게 최대한으로 정확하게 전달할 의무가 나에게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언어 사이에 필연적으로 패일 수밖에 없는 심연 속에서 쉽게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신중하게 측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두 언어 사이의 통사의 구조적인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각각의 어휘 체계 속에서 사전 상으로 상응하는 두 계열의 단어들이 각기 다른 의미 고리 속에 위치하기 때문에 종종 그것들이 환기시키는 것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작품 제목을 <유배의 계절(Saison d’exile)>이라고 바꾼 것도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공동 번역에 있어서 그 성공의 여부는, 말하자면 원작의 일차적인 해석자인 동시에 그 속에 담긴 한국 문화의 대변자인 나와 수용자측의 언어와 그 문화적 배경을 대표하는 공역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데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번역된 텍스트가 얼마나 유연한 문체로 다듬어졌는가 하는 번역의 문학성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공역자가 나의 텍스트에 어떤 응답을 해올 것인가에 있어서 한번도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만큼 공역자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참 신기하게도, 나의 공역자인 장 벨맹-노엘은 대가답게, 한글을 전혀 모르면서도 나 서툰 초고 속에서 이인성의 면모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늘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응하기를 즐겨했고 그가 작품에 대해 내리는 해석은 정확하고 깊이 있는 것이어서, 그와의 공동 작업은 나에게 즐겁고 유익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우리는 작품을 함께 느끼면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그와 비교되는, 각기 개성이 다른 꽤 여러 명의 프랑스 현대 소설가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히,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맞선 존재의 거북함과 철저하게 깨어있는 의식이 실존적 상황 속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구토감은 사르트르의 반영이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이나 문장들 그리고 즉물적인 묘사들은 로브-그리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립적인 이미지들의 현기증 나는 충돌들이나 거의 언어도단으로까지 나아가는 쉼 없는 문장들의 연속은 초현실주의를 환기시키며, 때때로 등장하는 파스텔조의 묘사나 한없이 연장되는 문장, 그리고 ‘그’와 ‘나’의 겹 대기는 흡사 클로드 시몽을 연상시킨다(벨맹-노엘은 클로드 시몽이 그의 자전적 소설 <아카시아>에서 이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다). 우리는 또 다른 프랑스 소설가들도 몇몇 입에 올렸다.
하나의 중편 속에서 그토록 다양한 면모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우선, 그의 작품이 얼마나 프랑스의 문학적 정서에 맞닿아 있는가를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대화를 통하여 나는 그의 문학이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글쓰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학 세계가 얼마나 세계 문학 전체의 흐름의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작업 속에서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되었다. 과연 무엇이 ‘작가’ 이인성을 존재하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의 한 작품을 읽으면서 그 속에 유머가 들어있지 않다면 과연 그것이 읽힐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속에 유머가 들어있지 않다면 어떤 독자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머는 그의 글쓰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나는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그의 글쓰기의 흔적들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구축되고 있는, 동시에 그 많은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정신을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허구의 세계 속으로 함몰되지 않으려는 그의 저항과 노력을 매우 강하게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많은 질문들 속에서 그가 먼저 미쳐버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창작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그의 노력은 글쓰기 작업 속에서 형태에 관한 지적인 관심으로 드러나며, 예를 들어 시점의 부단한 이동과 그에 따른 시제와 사건의 양태의 변화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그의 독자들에게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그의 소설 세계에 직면한 독자들은 결코 순진하게 그 속으로 빠져들지만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문학 세계가 단순히 지겨운 문체 실험실로 축소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그의 특유의 유머의 바탕 위에서 그의 글쓰기가 실현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최고도의 정신적인 에너지의 투여를 필요로 하는 창작 작업 속에서 유머 외에 어떤 다른 것이 작가로 하여금 그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그것이 외부의 실제 세계이든 내면의 허구 세계이든, 효과적으로, 그것도 경쾌한 방법으로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허락하겠는가?

* 서울대 강사이자 비평가·번역가로 활약하고 있는 최애영은 프랑스 PUF 출판사에서 <<귀를 기울이며 엿보는 자>>(로브-그리예론)를 간행했으며, <죽음의 심연, 그 언저리에서> 등의 평론을 발표하고, <<문학 텍스트의 정신 분석>>(쟝 벨맹-노엘 저) 등의 역서를 펴냈다.
(20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