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눈먼 정열의 이야기 |윤효|

–<로리타>에 대한 단상
어느 피로하고 무료한 날 나는 비디오 샵에서 <로리타>를 뽑아들었다. 몇 년 전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볼까 망설이다 놓친 필름이었다. 비디오 케이스 위엔 <나인하프 위크> 같은 에로틱 무비라고 씌어 있고 나보코프의 원작도 읽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잠깐 비워줄 영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엔 제레미 아이언스가 있었다.
냉정과 열정과 침묵이 공존하는, 분열이 숨어 있는 그의 얼굴은 광기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에 많이 쓰인다. 반듯하고 군살이 없고 정적인 그의 실루엣도 억제되었으므로 끝까지 갈 수 있는 정열의 소유자로 어울리며 자칫 역한 느낌을 주는 광기의 수위를 조절하고 균형을 잡아주어 끝까지 지켜보게 만든다.
오래 전에 본 <마담 버터플라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그 영화 속의 그는 그가 꽤 근사하게 나왔던 <데미지> 속의 캐릭터보다 더 선명하다. 다소 엉성하게 만든 그 영화에서 그는 관객이 보기에도 엉성한 여장을 한 남자 스파이를 사랑하는, 사무실의 철제 책상 같은 붙박이 체질의 관료다.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동양 여자에 대한 신비감을 지닌 그는 몇 년 동안 그 가짜 여자가 이끄는 기이한 섹스를 나누면서도 그녀의 성을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로서 파멸한 그가 몇 년 후 오페라 나비 부인이 공연되는 극장에서 그가 감촉했던 여자의 환영을 찾는 마지막 신 뒤에 그 스토리가 실화임을 말하는 자막이 올랐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을 보면서 자기 안에서 감정의 끝까지 갈 수 있는 정열의 속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리타>는 그 영화 보다 더 고독하고 강렬하고 비루한 정열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두웠다. 제레미, 그가 나오면 영화가 어두워진다고 말헀던 사람이 생각날 만큼. 험버트와 로리타가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풍광의 색채는 암청색이다. 그 색은 영화 속의 사랑이 서로 교감하고 결합하고 분리를 슬퍼하는 붉은 불꽃이 아니라 단단히 미쳐 있지만 세상은 물론 상대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살의를 숨긴 고온의 가스 불처럼 차갑고 무서운 불꽃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선 오로지 한 사람만이 원색을 품고 있다. 로리타다. 어디서 저런 여자아이를 골라냈을까 싶을 만큼 생생한, 감각의 마스터인 에드리안 라인이 한눈에 집어냈겠구나 싶은 그 여배우는 배우 같지도 않다. 로리타 자체다. 첫눈에 예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마르고 탄탄한 몸의 동작들과 풍부한 표정들은 말초 신경을 자극해서 혈관에 피를 돌게 한다. 그녀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신이 대지 위에 떨어뜨린 꽃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그 한철의 개화를 사심없이 보고 즐기거나 순간의 욕망으로 꺾어버리는 꽃.
그러나 정작 지독한 것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그녀의 캐릭터다. 머리가 텅 빈, 이성이라곤 없는 단순하고 광폭한 감정의 덩어리인 그녀는 무방비 상태의 얼굴로 최악의 공격을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의식하는 순간 분열에 이르게 될 행동들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것이다. 그녀는 꽃이지만 악마가 던진 꽃이다. 험버트가 감옥에서 죽은 해 겨울 아이를 낳다 죽는 말로도 그녀답다. 모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더이상 그녀 만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시점일테니까. 끔찍한 캐릭터지만 딱 일주일만 살아보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 자유로움, 거침없음, 텅 빔의 순간들을 살고 불을 꺼버릴 수만 있다면, 기억 없이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런 여자 아이에게 관통당하는 남자는 어떨까. 그는 되돌아올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한 잠언들을 무화시킬 만큼 맹목적인 열정이 편집적이고 내향적이고 예의바른 남자가 세상의 룰들을 거의 터득하고 사회적 자아를 완성한 순간 찾아온다면. 그의 열정은 그가 살아온 날들 전부를 조롱하며 고장난 전차처럼 달릴 것이다.
영화는 멀쩡한 한 남자가 어떻게 바보가 되고 죄인이 되어가는지를 정밀하게 그린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 그가 의도한 것은 없다.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그녀의 엄마와 결혼하고, 보호자 행세를 하며 함께 살고, 그녀를 육체와 돈으로 붙들어매고, 죄의식에 시달리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그녀에게 도망가자고 애원하고, 그녀를 훔쳐간 남자를 죽이고, 법정에 선다. 끔찍한 것은 그가 <마담 버터플라이>에서처럼 대상에게 속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옛날에 사랑했던 한 소녀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고 감촉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는 끝까지 집착한다.
열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과 페르조나 속에 끼워넣고 조율하며 살아간다. 힘들어지면 물러서고 버린다. 잔영을 품은 채 일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스템을 위협할 만큼 과도한 정열을 지닌 자는 추방당하는 것이 종족번식이나 약육강식 같은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과도한 열정의 주인인 험버트도 생에서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훔쳐간 사내를 쫒는, 마지막을 예감하는 길 위에서 중얼거린다. 그녀는 내 인생의 빛, 내 자극의 불꽃, 내 죄악, 내 영혼 이라고. 나는 죄악이 곧 영혼으로 등치되는 부분에서 숨을 삼켰다. 사람들에게 영혼이란 죄악을 빼버린 나머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그 둘을 등치시킨다. 껍질 속에서 무정형의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혈관이 비치는 부화란을 만질 때의 떨림과 두려움, 아슬아슬함이 구원이라면,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러니까 내가 조종할 수 없는 타자가 나의 영혼이라면 생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극단의 정열에 대해 감출 만큼 감추고 보여줄 만큼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이 잘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며 험버트의 정서에 이물감 없이 동화되면서도 나는 바랬다. 나의 등에 외로운 열정이 피운 푸른 불꽃에 달군 갈고리가 찍히지 않기를.

* 소설가 윤효는 소설집 <<허공의 신부>>를 펴냈다.
(200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