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사랑에 대한 단상 |홍정선|

체코의 마하(Macha)라는 시인은 자신의 일기 속에 다음처럼 충격적인 말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녀가 나를 기만하고 있다면, 하나님, 그녀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나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러면서 또 이렇게도 썼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내버려둘 바에는 차라리 창녀와 결혼하는 게 나을 것이다”라고. 그는 자신의 정부인 로리가 다른 남자와 동침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처럼 비명과 신음 소리로 가득 찬 말을 참으로 솔직하게(?) 뱉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희승 국어 대사전은 ‘사랑’이란 말을 “애틋이 여기어 서로 위하는 일. 또는 그러한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 속에는 애틋한 그리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한과 증오의 감정 또한 함께 하고 있으며,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저편에는 더럽고 추잡한 사랑 또한 자리잡고 있다. 사랑을 아름답게만 생각하는 것은 화장실에서 한사코 자신의 배설물과 자신의 몸뚱이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이다.
사랑은 한편으로는 뒤라스 부인이 샤토브리앙에게 남긴 “그대가 이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시간의 시계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나는 성안의 시계란 시계는 모두 멈추어 놓았습니다”란 말처럼 물질적인 세계와 통속적인 삶을 벗어나 애틋하고 아름다운 어떤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정자나 한강변에서 죽은 정여인의 생애에서 보듯 욕망과 음모로 점철된 시궁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처럼 사랑은 아름다운 만큼 더러워지기 쉽고, 애틋한 만큼 원한에 사로잡히기 쉬운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에 동시에 발을 디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겠지만 우리는 사전적인 정의로 현실 속의 사랑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만나는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과 채만식의 <<탁류>>에서 마주치는 꼽추 형보의 소름끼치는 사랑을 사전적인 정의는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아름답고 고상한 사랑의 종류에 못지 않게 두렵고 끔찍한 사랑의 종류 또한 숱하게 많으며, 그러한 사랑 역시 ‘사랑’의 한 종류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특히 아름다운 사랑은 요즘 유행가의 가사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를 마음속으로 바라지만 그러한 행운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무엇이 아름다운, 비극적인, 추잡한, 혹은 끔찍한 사랑을 만들어내는가를 살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랑에 빠질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발자크처럼 “당신이 실제로 훌륭한 분이건 아니건, 아름답건 추하건, 그것은 당신 자신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 당신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오직 저의 판단일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스스로를 “원컨대 용기이어라”라는 자세로 채찍질하며 걸어간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인하대 국문과 교수로 계간 <<문학과 사회>>의 창간 동인이었던 평론가 홍정선은 <<역사적 삶과 비평>> 등의 평론집 외에, 여러 문학 관련 편서들을 펴냈다.
(200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