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말 한 마리 |허수경|

산 숲 구덩이에 썩고 있는 물 속에서 걸어나온 말 한 마리, 빛 속을 걸어 다니고 싶었던 말 한 마리 저녁이면 고요히 제 구유로 밥 먹으러 오고 싶었던 말 한 마리 빛을 퉁기며 거품 침 속으로 공기를 우물거리고 싶었던 말 한 마리
말 한 마리 산 숲을 빠져 나와 벌판을 지난다 길 위에 꽃 지는데 초록 돋아드는 햇살 설렁이는데 눈 안에는 들판 들판에는 그렇게 많은 싸리꽃 일렁이는 시간을 빛 속에 나누어주고 있는 싸리꽃 말의 눈 안에서 싸리꽃은 얼마나 많은 씨앗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었던가
썩고 있는 물이 제 고향인 말 한 마리 들판을 지나 자동차 지나다니는 길로 들어서는 말 한 마리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오는 말 한 마리 지붕을 바라보다가 지붕 선을 바라보다가 지치는 말 한 마리
말을 읽는 말 한 마리 말을 건너가는 말 한 마리 구름 밑을 지나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말 한 마리 지친 말 한 마리 뜨거운 육체만이 이끌고 갈 수 있는 말 한 마리 무너지는 육체를 떠밀고 갈 수 없는 말 한 마리 다시 뜨거워져야만 동네를 빠져나가 길을 지나 들판을 지나 산 숲으로 갈 수 있는 말 한 마리 다시 썩고 있는 물로 들어갈 수 있는 말 한 마리

* 독일에 유학중인 허수경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의 시집을 펴냈다.
(200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