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우연히, 그것을, 다시 만나다 |김예림|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니, 떠오른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그렇게 있는 기억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누구에게나 자기의 깊고 깊은 안에 고여 있는 기억들이 있는 법이다. 나도 남에게 들려줄 만한 것은 못되는 한줌의 아주 작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오래도록 가지고 있을, 그런 기억말이다. 성장한 후의 내가 역으로 이런저런 의미들을 만들어 붙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하면, 햇빛 비치던 나무 마루에 관한 기억이다. 어렸을 적 살던 집은 이상하게도 조용하고 어두웠던 것같다. 형제가 많았는데도 내가 되짚고 있는 과거의 장면에서 나는 혼자다. 아마 동생은 어렸을 것이고 언니는 방안 어디에선가 종알거리고 있었을테지. 마당으로 향한 미닫이문을 열고 그 턱에 걸터앉아 있으면 어두운 마루 바닥으로 너무나 고요하게 햇빛이 들어왔다.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의 그 진한 고동색 홈 패인 마루 바닥에 햇빛이 모이고 그러면 뿌옇게 부유하는 먼지 알갱이들도 보였다. 높은 턱 밑 안쪽의 촘촘한 창살 무늬 그림자도, 달랑거리는 발 아래 바닥을 조용하게 떠돌았다.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따뜻하면서도 권태롭고 안락하면서도 슬프기도 했던 것같다. 생기발랄한 호기심같은 건 없었다. 무엇을 향해 반응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고즈넉했다. 이후에, 이 햇빛 비치는 마루 바닥은 삶의 적막함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표상이 되었다.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이 아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지니는 내밀한 소멸성에 대해 그 풍경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멸로서의 삶, 어떤 기미로서의 삶에 대한 나의 감각은 햇빛 비치는 마루 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후에는 오정희의 소설을 통해, 우연히 보게된 <행복>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리고 데 키리코의 길게 사라지는 건물과 그 그림자를 통해, 절실하지만 간접적으로 되살아났다.
얼마 전, 하루종일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며 장속 정리를 했다. 옷가지들과 잡다한 물건들을 이렇게 저렇게 넣다뺐다 해보았으나 자리가 영 마땅치 않았다. 평소에 작은 서랍장을 갖고 싶었던 나는 당장 가구점으로 가서 하얀 색의 장을 계약하고 돌아왔다. 장은 일주일 후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안써지는 원고 때문에 끙끙거렸고, 집안은 책과 먼지와 세탁물들 때문에 한번 들고 흔든 상자 속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보냈을 때, 하얀 서랍장이 들어왔다. 침대 옆에 놓여있던 커다란 교자상을 치우고, 그 밑에 깔아놓았던 작은 카펫을 아래로 밀고 장을 들여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기저기 나와있던 옷가지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랍장에게 고마워할 일은 정작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오후, 내내 글을 끄적이다가 이층으로 올라간 나는 창쪽을 향해 침대에 올라 앉았다. 그 순간 서랍장 주변에서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다. 내가 봤다기 보다는 이미 펼쳐져 있던 그것이 나를 유인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인지도 모른다. 장이 들어오기 전에는 넓은 상과 카펫트로 가리워져 볼 수 없었던 창가의 나무 마루에, 오후의 햇살이 들어와 따뜻한 빛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먼먼 기억 속의 마루 바닥, 커버린 다음에는 텍스트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되살아났던, 유년기의 그 햇빛 비치던 마루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밝지만 곧 사라져 없어질 듯한 빛의 기운과 따뜻하게 데워진 좁은 나무 마루가.
지금도 옆에 머물러 있는, 이 고요하고 근원적인 표상을 나는 사랑한다. 네루다가 풍만한 상상력으로 양말을 기리고 소금을 기렸던 것처럼, 햇빛 비치는 나무 마루를 정말 기리고 싶다. 그러나 시적 능력이 전무한 나로서는 다만, 살아가는 일의 아득한 진실을 담고 있는 이 깊고도 말간 장소가 눈물겹도록 아프고 반가울 뿐이다.

* 연세대 국문과 강사인 비평가 김예림은 <근대적 미와 전체주의>, <깨진 거울 앞에 선 문학> <‘틈’의 상상 ‘사이’의 이야기> 등, 활발한 평론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