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알 수 없는 것들 |최시한|

거창하고 심오한 말은 왜 거짓처럼 보일까.
어째서 논리적일수록 부자연스럽게 여겨질까.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혼란을 조장하여 중심을 본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U턴을 했는데, 방금 전까지 나를 따라왔던 차가 앞에 가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난폭하게 끼어들었어도, 그 운전자가 슬쩍 손을 들었다 내리기만 하면, 모두 용서가 되는 걸까. 자기 잘못으로 사고 난 증거가 눈앞에 뻔히 있는데도, 고함을 지르며 상대의 멱살을 잡을 수 있으려면, 평소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인물이 당선되지 않으면 나라가 금세 망할 듯이 흥분했던 사람들은, 그 인물이 당선되고 나서 나라를 정말 망칠 뻔한 지금,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아니, 나는 이렇게 맺혀 있는데, 그 일을 어쩌면 그토록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양장점, 양화점들은 다 어디 갔나. 옷과 구두를 수선하거나 팔기만 하는 집이 아니라 맞추는 집 말이다. 그런데 노상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 자리에 있는 우리 동네 양복점은, 어째서 아직도 계속 문을 열고 있을까. ‘아이스케키’는 어디 갔으며, 그 많던 삐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핸드폰이 좋아도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진 데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전당포, 전파사, 자전거 수리점, 쌀가게, 대서소…… 그 가게들, 그 주인들의 경험과 기술, 그들을 지탱했던 팽팽한 욕망이 변두리로 밀려나는 게, 누군가의 잘못일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재혼을 하는 사내가, 자기도 자식이 있으면서, ‘아이가 딸린’ 여자를 왜 싫어할까. 본인이 괜찮다는 데도 주위에서 어찌 그토록 극구 말릴까. 이혼 때 여자가 어떻게든 자식을 안 맡으려 해서, 끝내 외국으로 수출되는 아이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왜 남자는 홀몸인 여자하고만 결혼해야 한다고들 하는 걸까. 자식이 있는 여자는, 왜 자식 때문에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일까.

일기예보를 하면서 “내일은 비가 많이 내리겠습니다” 하지 않고, “내일은 많은 강수량을 보이겠습니다”라고 이상하게 말하는 습관이 어째서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을까. “너무 사랑한다”는 말이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뜻일 수 있는데, 자꾸 “아주 사랑한다”는 뜻으로만 쓰이는 것도, 어디선가 어떤 균열 같은 게 생기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헌 옷, 헌 가구, 헌 차를 자꾸 버리면, 누군가가 더 가난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새 옷, 새 가구, 새 차만 찾다보면, 어느 날엔가 헐벗고 굶주린 끝에 모두 함께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수만 년 끄덕없이 살아왔으니, 이런 생각을 그만 둘 때가 된 건 아닐까.

어떻게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보다 아내를, 아내보다도 부모와 자식의 죽음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것을 견딘 사람들한테, 이후의 삶은 어떤 삶일까. 저 저자거리의 소란과 꿈틀거림이 모두 그저 견디기 위한 몸부림인 것일까.

말하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을까.
경계를 지우기만 할 뿐 새 경계를 만들지는 않을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빠질 길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소설가 최시한은 소설집 <<낙타의 겨울>>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외에도, <<수필로 배우는 글읽기>> 등의 교양서를 펴냈다.
(200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