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가자에서 온 편지」를 다시 읽으며 |장경렬|

가산 카나파니는 이스라엘의 첩보 요원이 자동차에 장치한 폭탄으로 인해 1972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팔레스타인 출신의 작가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단편 소설 가운데 「가자에서 온 편지」라는 것이 있다. (무스타파라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이 짤막한 소설과 처음 만났던 것은 언제인가. 그렇지, 이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을 처음 펼쳐들었던 것은 하버드 대학 주변의 책방을 돌아다니며 세월을 보내던 1990년대 중엽이었지.) 알고 있겠지만, 가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서안 경계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거주 지역이다. 이 지역에 사는 어린 소녀 나디아가 이불을 들쳐 다리가 절단된 자심의 몸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소설을 따라 읽었을 때였다.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와서는 코끝을 맴돌다 다시 가슴으로 내려와서는 무겁게 마음을 내리눌렀다. 오랜 세월 저편에 있었던 그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던 것이다.
다름 아닌 뉴스 때문이었다.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에 대한 그 끔찍한 테러 공격 이후 연일 터져 나오던 뉴스 가운데 하나 때문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 있든 테러 조직을 완전히 뿌리뽑을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무한정 계속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를 알리는 뉴스가 나디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테러 조직을 완전히 뿌리뽑을 때까지? 미국 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필경 이슬람 문화권 내의 각종 반미, 반이스라엘 테러 조직들이리라. 무력에 의해 과연 테러 조직이 근절될 수 있을까. 애초에 테러의 발생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이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 불현듯 기억에 되살아났던 것이 「가자에서 온 편지」와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팔레스타인의 어린 소녀 나디아였던 것이었다. 접어 두었던 책을 펼쳐 다시 그 소설을 읽는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곧, 소설 속의 ‘나’가 조만간 푸르름과 물과 사랑스런 표정의 얼굴들로 가득한 미국 캘리포니아로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 가서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인 무스타파와 함께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음도 알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일에 신경을 써준 친구 무스타파에게 감사하면서도, 갑작스럽게 도미를 포기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왜일까. 그는 친구와 함께 오래 전부터 빈곤과 패배의 땅 가자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어 오지 않았던가. 그 기회가 찾아온 순간 그가 이를 포기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쿠웨이트에서 취업 허가를 받아 떠나 있던 그는 다가올 미국으로의 “달콤한 여행”을 예상하며 짐을 꾸리기 위해 가자로 되돌아온다. 가자를 다시 찾은 소설 속의 나는 어머니와 재회하고 또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형수와 재회한다. 그리고 눈물에 흥건히 젖은 형수를 통해 그녀의 딸이자 그의 조카인 나디아가 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알게 된다. 조카를 위문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자신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하던 나디아의 등을 두드리며 소설 속의 나는 분위기에 밀려 그녀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너를 위해 선물을 많이 사왔는데, 네가 편지로 나에게 갖고 싶다고 말했던 빨간 바지도 사왔다”라고. 그 말을 듣자 나디아는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양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다. 영문을 몰라 당황해 하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나디아는 몸을 덮었던 이불을 들친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나디아의 몸은 허벅지 위쪽에서부터 잘리어나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한 나디아의 모습을 본 소설 속의 나는 충격 속에서 새롭게 눈을 뜬다. 새로운 모습의 가자에. 슬픔에 몸을 떨며 울고 있기만 할 수 없는 가자에, 잃어버린 다리를 되찾기 위한 오랜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가자에, 바로 그 가자에 소설 속의 나는 마음의 눈을 뜬다.
나중에 사람들로부터 지난번 이스라엘군의 폭격 당시 불타던 집안에서 사랑하는 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위로 몸을 던졌다가 나디아가 그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생들을 놔둔 채 탈출을 했더라면 잃지 않았을 다리를 그런 연유로 잃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설 속의 나는 나디아의 슬픔에서 가자의 슬픔을 보았던 것이고, 또 나디아의 사랑에서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소설의 끝 부분에 이르러 소설 속의 나는 친구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떠날 수 없노라고. 그리고 친구에게 권한다. 이곳 가자로 돌아올 것을.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아픔을 치유해 주기 전에 어찌 테러가 뿌리뽑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과연 2000년 전에 버리고 떠났던 땅으로 되돌아와서 그 동안 살던 사람을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과 그의 지지자들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겠는가. 설사 2000년 전까지 살아온 연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으로 오기 오래 전부터 지금 난민의 처지로 떠돌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과연 어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형제애를 느끼고 있는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이 슬픔과 분노의 눈길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지지자들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테러의 종식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다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또 아픔을 치유하는 길밖에.
나디아의 눈을 적시는 슬픔이 걷힐 날은 언제일까. 또 나디아가 잃었던 다리를 되찾을 날은 언제일까. 아니,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는 이 단순한 진실에 우리 모두가 눈뜨게 될 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날은 결코 오지 않을까.
*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평론가 장경렬은 평론집으로 『미로에서 길찾기』를 펴냈으며, 그 외 다수의 문학 평론과 문학 이론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200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