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금발의 제니 |서준환|

햇살이 화사한 어느날 오후 ‘세미 콜론’이라는 찻집의 창가에서 금발의 제니를 만났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별 얘기를 나누지 않고 커피만 홀짝거렸다. 나는 무슨 말을 이어갈까 궁리 중이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찻집 앞을 지나가다 말고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눈만 깜빡거리며 유리벽 너머로 그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래?” 제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제니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는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커피잔을 내려놓았을 때 남자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제니와 나는 찻집에서 나와 그 길로 헤어졌다.
그 뒤부터 이상하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씻지도 않고 이부자리에 쓰러졌다. 잠자리에 들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눕자마자 의식이 몽롱해졌다. 이내 나는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는 동안 꿈도 꾸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취한 숙면이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평소대로 전철을 타고 출근길에 나섰다. 뜻밖에도 객차의 한 귀퉁이에서 금발의 제니를 보았다. 제니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할 틈도 없이 제니는 전철에서 내렸다. 나는 제니의 주의를 끌려고 닫힌 자동문의 유리를 두드렸다. 승강장을 따라 걷던 제니는 내 쪽으로 힐끗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 시선은 나를 투과해서 다른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부서의 Z와 마주쳤다. “어이, Y, 어제 잘 들어갔어? 앞으로 몸 생각해서 술 좀 작작 마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를 Y라고 부르다니. 그때 마침 Y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Y가 아니라 Z였으며, 내가 Z라고 알고 있었던 이는 X로 뒤바뀌어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들에게 어찌된 영문이냐고 되물을 여유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울은 지금껏 내가 나로 알아온 내 모습을 확실히 비춰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 회사 동료들은 내가 Y라고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상사고 후배고 간에 그들은 모두 나를 Y로 믿었고, 내가 Y로 알았던 Z나 Z로 알았던 X는 새로 얻은 배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은 원래 A였다.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부서의 여직원에게, 오늘까지 넘겨받을 관리계획서가 있는데 A가 안 보인다고 슬쩍 떠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서류함을 정리하며 심드렁하게 A가 누구냐고 반문했다. 그 말에 내 등골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결국 나는 Y가 되어야 했지만, 다른 부서의 회사 동료로만 접해 왔던 Y가 이전까지 무슨 일에 관심을 쏟아 왔으며 어떤 일을 벌였고 누구와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탓에 그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그런 나를 주위 사람들은 기억상실증 환자로 낙인찍고는 정신과에 가보라고 떠밀었다.
“글쎄요… 지금 얘기하신 내용이 사실이라면, 현재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환자분의 정체성이 다른 채널로 이동한 것 같다고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안색이 희멀쑥한 정신과 의사는 농담반 진담반의 어투로 그렇게 진단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더 이상 도움될 만한 얘기를 듣지 못하고 의사의 진찰실에서 나왔다. 그때였다. 저만치에서 금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니였다. 나는 그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녀의 자취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었다. 제니에게 전화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다이얼을 누르려는 순간 아무 번호도 기억나지 않았다.
병원 문을 나서면 곧장 번화가의 네거리였다. 햇살이 화사한 오후였다. 건널목 맞은편에는 ‘세미 콜론’이라는 이름의 찻집이 있었다. 나는 그 찻집 앞을 지나치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 찻집의 창가에서 금발의 제니가 어떤 남자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고 곧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 앉아 있는 남자는 사라진 A였다. 그제서야 나는 혼곤한 잠 속에서 빠져 나온 것 같았다.

* 소설가 서준환은 <<문학과 사회>> 2001년 여름호에 <수족관>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200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