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불가능함이 시를 쓰게 한다 |채호기|

시를 쓸 때마다 나는 몸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로 옮기는 그 순간의 작업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싶어한다. 백지에다 언어를 쓰는 순간 모든 생각과 느낌이 그 언어로 확정되어버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다시 쓰거나 수정할 수 있는 걸 뭘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몸 속에서 숙성되고 있을 때와 백지에 언어로 씌어지기 시작할 때는 분명히 다르다. 백지에 언어로 쓰기 시작하는 순간 생각과 느낌은 뒷전이 되고 언어가 언어를 부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만물과 상응하는 감각적인 몸에서 정밀한 고등 수학 문제를 푸는 이성적인 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술병에서 술이 익을 대로 익다가 화학 작용에 의해 생긴 가스의 압력으로 생기는 분출이나 석류 열매가 익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런 현상에다 시 쓰기를 곧잘 비유하는데, 그러나 그런 식으로 몸 속에서 시가 유출될 경우에도 백지에 쓰는 순간만큼은 이성적인 몸에서 도저히 탈피할 수가 없다.
그 절망감은 또한 더 근본적으로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때 나는 실재를 담아내기에는 언어가 항상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언어는 실재의 그림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언어와 실재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서 서로 비교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실재는 실재일 따름이고 언어는 언어일 따름이다. 그처럼 시에서의 언어는 더 이상 실재의 그림자나 매개체가 아닌 독자적인 실체다. 더 나아가 한 편의 완성된 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때 언어는 또 다른 실재인 것이다.
한 편의 시에서 언어는 제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자리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고, 독립적으로 있을 때와는 달리 앞뒤 언어의 의미나 색깔, 소리에 조응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토끼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귀가 있고 심장이 있고 다리가 있듯이 언어와 언어는 이음새가 없이 연결되어 하나의 살아 있는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시는 토끼가 토끼 새끼를 낳듯이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얘기했듯 아주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언어 하나 하나가 봉합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봉합해나가기 전에 시의 설계도는 몸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봉합해나가는 순간, 백지에 언어를 쓰는 순간, 그 설계도는 변경될 수밖에 없다. 언어와 실재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실재의 풍부함을 갖춘 사람이라기보다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언어 능력은 언어 자체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재의 풍부함에 언어에 대한 남다른 예민한 감각이 보태어진 것일 것이다.
시에서의 언어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사물을 지칭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상에서 “유리창 닦았니?”라고 물었을 때 실제 유리창을 닦았는지를 묻는 것임에 거의 틀림없지만, 시에서 “유리창 닦았니?”라고 물으면 거의 언제나 실제의 유리창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시의 언어가 일상 언어보다는 실재와 분리되어 있고 독자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언어는 어느 만큼 실재와 분리될 수 있고 어느 만큼 독자적일 수 있을까? 잭슨 플록의 추상 회화처럼 실재와 완전히 분리하여 색채와 형태만의 독자성을 얻을 수 있을까? 잭슨 플록의 그림도 외부 실재를 모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감정이나 내면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니 색채와 형태만의 완전한 독자성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회화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실재를 환기시키지만, 시는 언어의 이미지 환기 뒤에 이미지를 통한 실재 환기로, 회화보다 한 과정 더 거치기 때문에 더더욱 언어 그 자체의 독자성을 갖기는 어렵다. 언어가 완전히 독자적이려면, 그것은 더 이상 언어라기보다 얼룩에 가까운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언제나 실재를 환기시키면서 이미지나 의미를 나타낸다. 언어는 실재와 절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절망한다. 백지에 시를 쓰는 순간 나는 언어가 실재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언어를 잊어버린 채 실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나는 가끔 실재하는 어떤 것들이 아무런 난관도 없이 언어화할 것처럼 너무나 순진하게 믿는다.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시 쓰기에 열정적으로 매달리게 한다.
그러나 시를 쓸 때마다 나는 절망한다. 실재와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둘의 일치를 항상 꿈꾸기 때문이다. 그 꿈으로, 그 불가능함의 동력으로 또한 나는 시 쓰기에 거듭거듭 매달린다.
(2001.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