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가족 조각상 앞에서 |채희윤|

후배 조각가가 전시회를 연다. 귀국 후에 다섯 번째 전시회라고 한다. 꼭 와서 이번 작품을 미리 보고 글을 한 편 써달라고 했다. 내겐 그림은커니와 조각은 더욱 난해한 예술이다. 처음엔, 판소리에서 말하는 귀동냥에서 얻은 귀명창은 있어도 눈명창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사양했는데, 재차 부탁도 하고, 또 작업장이 학교에서 30분 가는 시골에 있어서, 하는수없이 다른 동료 선생들과 함께 갔다.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밭들 사이로 작업장은 있었고, 작업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창고에는 가득 가을의 저물녘 볕들이 쌓이고 있었다, 정미소에 빻아져 나오는 양곡처럼 흰빛들이. 그 사이에 대리석, 브론즈, 화강암의 조각들이 이십 여 작품, 널어져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한 조각가의 노고가 30평 가량의 창고 바닥에, 신생을 꿈꾸며 낮은 소리로 호흡하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므로 주욱 돌아다보고 –때로는 외교적 관례 식으로다 잠깐 잠깐 멈추어 좋다느니, 개성적이라든지, 기법이 다르다 등등의 췌사들– 작업실에 붙어 있는 작은 그만의 공간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의 설명대로 이번 전시회의 주제인 ‘가족’들의 상들을 보는 데 갑자기 찬바람을 삼킨 듯 목이 칼칼했다. 사실 바람도 없었고, 오히려 밀폐된 장소여서 공기도 나빴기 때문에, 바람을 삼킨 것은 아니었다.
조각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서, 마치 열병식을 하는 신병들 같았다. 동쪽에서 시작해서 부부의 상이 있었고, 그 곁으로 부모와 아들이나 딸이 하나 끼어 있는 상들, 내 바로 앞에는 모자, 모녀의 상들이었다. 그 중 모녀의 상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내 귀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촌누이와 외숙모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어머니가 슬피 우시면서 골목길에 서 계실 때, 늦가을 바람 가득한 항구 도시를 떠나면서 우리를 보던 두 모녀의 모습과 목소리였다. 소리는 공간을 헤치고, 그리고 생각은 시간을 허물고 내게 다가왔다. 지금은 성공한 둘째 아들 덕에 잘 살고 있다는 풍문만 들릴 뿐 어머니도 계시지 않아 연락이 끊겼다.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이니 문제는 안되지만, 그때 巫病에 걸려 내림굿을 받고, 모든 친척에게 버림받아서, 외숙모는 오직 딸만 데리고 떠돌았다. 아들들은 우리 집에서 기숙했지만, 딸은 절대로 맡겨주지 않아 여섯 살 짜리 아이는 어미를 따라 유랑했다. 그래도 제삿날에는 친정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받아, 또 큰아들이 우리 집에 있으니 반드시 잊지 않고 집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며칠 묵었다. 머리 굵은 아들은 동생을 놓고 가라고 소리치며 외숙모에게 대들다가 마침내 온 가족들이 울고 말았고, 급기야 아버님이 형을 불러 야단까지 쳤다. 이튿날 사촌형이 학교를 간 틈을 타서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울던 어머니와, 그녀들의 모습이 어린 내게도 퍽 충격적인 인상을 주었다. 어머니가 준 누님의 큰 외투를 바닥에까지 흘리며 외숙모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던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과, 그때까지도 풀지 않고 하고 있던 쪽진 머리에서 빠져나온 귀밑머리가 애처로웠을지도 모른 일이다. 아니었다. 기껏 고등학교에 다니던 사촌 형들이 그날 밤, 자신들의 방에서 소리 죽여 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뭘까?
씁쓸한 내 귀에 소리가 들렸다. 조각가가 거처에 요기 할만한 것이 있다며 가자고 우리를 끌었다. 거실 하나, 방 둘, 부엌으로 꾸며진 벽돌집으로 들어가자 삼겹살이 구어지고 있었다. 작업을 할 때는 혼자서 기거한다며, 아내가 오면 더 번거로울 따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직 대학에 자릴 얻지 못하고 있는 그는 돈을 대신 벌어야 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신세지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이태리에서 돌아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요이. 대학 교수가 못된 것이 아니라, 8년 넘게 길들여져 왔던 이태리에서 배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장가만 안 갔고, 자식들만 없었다면 이미 그리로 다시 갔을 겁니다. 굶어 죽는 일은 없고, 여전히 내 작품을 작품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여러 조건으로 평가를 받는 것에 힘이 들었습니다. 내가 흔들려서 참 못된 짓거리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힘이 들었어요. 아내가 힘이 들고, 아내가 힘드니 아이들이 힘이 들었고요. 다 내 못난 탓이지요. 허허허.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을 위한, 그들에 의한 작품전입니다. 몇 개는 아내와 아이들의 몫을 주려고 안 팔랍니다.”
팔리지도 않을지 모르는데, 동료 중의 하나가 농으로 끼여들었지만,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고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 어려웠던 방황 시기에 누가 나를 위해 같이 울어주며, 사심 없이 기뻐하겠습니까? 가족들밖에 없지요?”
동료가 나선다. 이번에는 나를 소재 삼아 농을 한다. 나는 통 가정적이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왜 그러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나는 가정적이라 하기는 곤란하다. 가사도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학교 아니면 글을 써보겠다고 혼자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소위 아시아적 가치, 아니 가족주의에서 나는 초연한 것인가? 결코 아니라는 판단을 나는 할 수 있다. 나도 가족에는 필사적일 것이다. 내 아이들, 내 아내의 일에 나는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없다. 지금은 내가 그리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들의 혈액 속에 용해되어 면면히 흐르는 이러한 정서적 공통성을 민족성이라고 표현하고, 그 민족성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 공통 인자로서 작용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는 그런 특성을 갖는다. 내 외사촌형이나 교수가 못된 조각가뿐 아니라, 일을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나나, 바람기가 심했던 선고 역시.
이번 그의 圖錄에 들어갈 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오면서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비록 아시아적 가족주의가 다른 대륙에서 폄하를 받고, 부정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 예술가는 더 깊은 나락에 빠지지 않게 한 기능을 하는 한에 있어서 버려서는 안돼는 우리의 사고 태도가 아닐까 하는, 매우 복벽적이라고 평가받을 생각을 했다. 더구나 추워지는 이 가을에 말이다.

* 광주여자대학 문예영상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소설가 채희윤은 소설집 <<한 평 구홉의 안식>> <<별똥별 헤는 밤>> <<스무고개 넘기>> 등을 펴냈다.
(20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