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럼] 진보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김정환|

레닌의 용어를 빌어 금융-독점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라면, 신(新)자유주의는 현실사회주의를 거의 말살한 세계자본주의의 `그 후` 단계라 할 만 하다. `그 후`란 물론 시간적으로 더 뒤라는 뜻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된 무시간(無時間) 상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 `그 후`단계에서는, 갈수록 세상은 나아진다는, 고전적인 `시간-진보 개념`이 혼란에 빠진다. (차관, 금융조작, 노동-화폐가치 차액 등을 통한) 경제수탈은 정치에 비해 `점잖고 안 보이기`는커녕, 1979년 과격 회교 혁명을 부르짖던 이란 청년들의 서구식 청바지 옷차림, 중국 천안문 광장에 (이미 서 있는) 可口可樂(코카콜라) 선전판, (동남아시아의) 앙코르 와트 밀림에 (건설 예정인) 롯데리 못지 않게, 점점 더 가시적이고 노골적으로 되어 간다.
그 결과 삶의 질과 물질적 풍요의 관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군대침략과 경제침략을 동일시하는 이전(以前) 자본주의적 심성(心性)이 만연하는데, 그 노골-가시화의 대표적이고 전반적인 원인-상징은 정작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라) `경제의 정치화` 혹은 `군산복합자본=미국대통령 등식`의 구현으로서 조지 부시다. 그는, 금융조직 폭력배라 할 헤지펀드의 시대마저 과감히 밀처내면서, 비열한 서부 총잽이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점잖은 세일즈맨 클린턴` 그 후의 대통령 시대를 (경제는커녕 정치 이전의) `세계 전쟁 불사` 시대로 만들어 가는 주인공 역할을 만끽하고 있다.
`존 웨인의 신화`를 깨부수는 것은 좋지만(사실 서부개척 시대에 `정의의 총잽이`는 없었다), 보이는 정치=전쟁(형식)과 안 보이는 경제(내용)의 동일시는 그 변증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의 변증법은 끝내 이윤 추구적이고 그렇게 자생적이지만, 그런 채로도 그 변증법이 `경직된` 사회주의를 능가할 만한 인간력(人間力)의 파란만장한 가능성을 자본주의에 부여했다면, 동일시는 삽시간에 미국권력이라는 너무도 위험한 장난감을 `야만의 어린애`에게 쥐어 준 위험 앞에 세계를 내몰고 있다.
그것에 맞선 대항세력의 사정 또한 세계무역센터 테러에서 보듯, 진리의 종교가 세속의 정치로, `안 보이는` 정치가 `보이는` 테러로, 다시 순교의 테러가 가학의 테러로 갈수록 타락하고 있다. 그렇게, 물자 생산량과 기술발전의 속도가 비약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질적 발전한 20세기 ` 그후`, 21세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최첨단 무기와 수천 년 전의 천연요새가 정면 충돌하면서 천년 전 서방 문명 대 이슬람문명의 종교전쟁을 재현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진보 자체를 무색케하는 그로테스크의 참극을 연출하고 있다. 군산복합자본에 맞선 `합리-이성-휴머니즘적` 자본과의 연대라는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세계전략의 (실패) 후유증은 이토록 엄청나고 급박하다.
이런 때에, 세계 지배를 꿈꾸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동아시아의 문화적 소통과 상생을 논하고 실제로 도모하는 일이 이제는 유행이지만, 더 당연히, `유행`보다 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맞서`라는 단어가, `설령 불가피했더라도 진정 옳지는 않았던` 아랍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벌써, 불길하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무엇을 소통하고 상생하면서 `맞섬의 닮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종교적 문화전통의 공유는 그 자체로 대안이 될 수 없다. 유교는 역사적이지만, 바로 그렇게 인간과 짐승이 구분되지 않던 시절 `짐승 같은`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시기, 출발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적으로 예론(禮論), 즉 형식을 내용화 할 수밖에 없었던 종교다(더군다나 지금, `짐승 같은`이라는 형용사는 욕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한편으로 자연보호운동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인간 너머 가상현실-기계`로의 지향 때문에). 불교-힌두교는 삶과 죽음과 가상현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역동체지만, 그렇게 예술적이지만 그 역동에 역사적인 발전이 없고, 과학의 가상현실에 압도되는 형국이다. 도교는 `그 후` 자체의 형상화로서, 무릉도원의 완료형이고 그러므로 `그 후`의 무시간성을 `시간 너머 진보`로 바꾸어낼 동력이 없다. 한마디로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안이 될 수 없다. 동양사상에 대한 서양 현대물리학의 접근, 통틀어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에 매료되는 현상은, 과학문명의 휴양소를 식민지 자연경관에 짓는 사상 수탈의 틀을 크게 벗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서 그 답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이미 `명쾌`가 그 자체로 `독재`인 시대다. 다만, 이미 말한 것 외에, 동아시아 소통-상생을 위해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역사`고, 유구한 아시아적 종교전통(사실 모든 종교는 아시아적이다)이 아니라 서양과 동양 사이 가치관의 `충돌`, 그 충돌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이며, 더 나아가 `그 후`의 무시간성을 시간 극복의 진보로 바꾸어내는 `그 무엇`이라는 점은 미리 감잡아볼 수 있겠다.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도 명쾌는 독재다. 다시 다만, 우리는 `진보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역사적 `상관관계`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 너머`를 창조하는데 긴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상관관계 자체가 `진보` 혹은 `예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될 때까지. 사실 진보는 너무 역사에 매여 있었고, 그러므로 `점점 낡아가는 진보`일 밖에 없었고, 예술은 가상현실의 상부구조를, `눈에 보이게` 이뤄왔다. `안 보이는` 창조과정과 `안 보이는` 상관관계의 `관계`를 가시화(可視化)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경제 가시화의 폐해를 막는, 그리고 극복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200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