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사랑의 수수께끼 |김용희|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는 일종의 생략과 반복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의 일상은 끝없는 반복 속에 놓여 있지만 반복 속에서 우리가 기껏 기억해 내는 것은 일상의 연속된 시간 선상에서 분리되고 생략된 몇몇의 장면들이다.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이러한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생략되고 빠진 채 다만 몇몇 스크린의 장면으로 기억하는 어떤 말, 내음, 체취, 눈동자의 움직임 같은 것이 아닐까. 전체로서 기억되지 않는 사랑, 생략되어 끝없이 수수께기로 남아 있는, 그리하여 해호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조그만한 비밀 상자가 아닐까.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 <마지막 황제>의 마지막 장면에서 열어본 조그만 상자 안에는 푸이가 어릴 때 잡아 두었던 귀뚜라미가, 영화 <아멜리에>에서 아멜리에가 욕실 벽돌 뒤에 숨은 상자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전에 그 집에 살았던 누군가의 어릴적 꿈과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 구슬, 딱지, 장난감 자동차 이런 것들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거실 진열대 위에 얹어 놓은 훈장, 트로피, 감사장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들인가도 알게 된다.
나무곽 작은 상자 안에 봉인된 비밀들이 웅성거릴 때 순간 발이 휘청하기도 한다. 영화 <화양연화>는 상자 안이 덜컹대며 열려지려는 순간에 대한 영화이다. 카메라는 느리고도 지루하게 인물들의 표정과 발걸음을 핥으며 더듬는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느리게 반복적이지만 긴장의 정점에서 맴돌며 앓는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들이 반복된다. 좁은 복도, 아파트 계단을 국수통을 들고 끝없이 오르내리는 첸(장만옥)과 언제나 일정한 시간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퇴근하는 차우(양조위). 그들의 스침은 반복되는 만큼 극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출근과 퇴근, 식사와 외출, 시간은 언제나 반복해서 흘러가지만 그들 사이의 극미한 변화조차도 이들은 표면 위로 드러내기를 주저한다. 영화는 그들의 감정과 움직임에 대한 엄격할 만치의 생략으로 절제의 극단성을 드러낸다.
같은 아파트의 옆집 사이인 이들은 각각의 남편과 아내가 불륜 관계란 사실을 알게되면서 서로를 위로하다가 서로에 대한 알지 못할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배우자처럼 될 수 없다는 엄격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우리 사이는 결백해”라고 중얼거리지만 이미 변화의 기미는 균열처럼 번진다. 언제나 깔끔한 60년대 풍 퍼머를 하고 붉은 색 차이나 칼라 원피스를 입는 장만옥, 포마드 기름으로 빗어 넘긴 말끔한 신사 양조위는 감정의 절제와 정숙함을 잃지 않는 자기 엄격을 드러내지만 서로의 이별 연습을 하며 벽에 기대어 한없이 숨죽이며 울음 울기도 한다(숨 죽인 울음, 감정의 격랑…).
‘화양연화’, 꽃처럼 만개하고 화려했던 시간들. 차우와 첸은 그 시간을 붙잡고 싶어하지만 사랑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순간이며 순간이기에 사라질 시간들이었다. 차우는 상해로 떠나고 첸도 아파트를 떠난다. 몇 년이 지난 후 차우는 아무도 없는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을 찾아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입을 대고 말을 한다. 그 말은 대체 무슨 내용이었을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다른 사람이 알게되길 원치 않았어요. 비밀로 간직하길 원했던 거지요. 두 사람은 산으로 갔습니다. 비밀을 묻기 위한 나무를 찾기 위해 나무를 발견해내고는 구멍을 팠죠. 두 사람은 그 구멍에 비밀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구멍을 진흙으로 메웠구요.”
차우가 어떤 말을 하였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사랑이 알려지고 밝혀지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은 간직하고 묻어두는 것이라는 것을 감독은 차우의 내밀한 웅얼거림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그렇게 다시 숨겨진 신화 속으로 들어가고 해답을 기다리는 질문으로 남게 된다. 돌 속에 묻힌 채 불멸하는 사랑, 불멸하기에 공허한, 그래서 사랑인, 말해지지 않는 거대한 수수께기(riddle)인 것이다.

* 평론가 김용희는 <<기호는 힘이 세다>> <<천국에 가다>> 등의 평론집을 펴냈다.
(200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