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신중현은 왜 한국 록 음악의 대부인가 |성기완|

우리는 왜 록 음악을 하게 되었나. 록큰롤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사실 우리와 록큰롤의 관계 속에는 의문점들 투성이이다. 정확한 것 하나는, 이 음악이 우리의 음악적 전통과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전통에서 비롯한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나에게는 국악보다도 록큰롤의 어법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느 음악 속에 귀를 담그고 사는 사람인가 말이다. 이러한 록 음악의 ‘대부’가 바로 신중현이라는데, 의문부호로 점철된 이 음악 장르의 대부는 또 누구인가. 그는 정확히, 무엇의 대부인가.
그 질문에도 역시 완벽한 대답을 바랄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탐색에서 내가 얻은 해답은, 그가 바로 ‘정처없음’의 대부라는 점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음악사는 떠돌이 신세다. 일제의 직간접적인 문화적 억압과 길들이기의 과정에서 태어난 사생아 ‘뽕짝’이 어른들 귀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전통가요’라 부르는 건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민감한 귀를 가진, 50년대의 청년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의 귀는 정 둘 곳이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나’의 소리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화적 영양실조의 시절, 그 젊은이는 어디에 의탁했을까.
지금도 거의 달라진 게 없지만, 당시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든 것 앞에 무장해제되어 있었다.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오는 레이션을 끓여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펄펄 끓여 우리식 록큰롤을 만들어 들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기댐’이 아니라 일종의 절박한 붙들기였다. 50년대의 배고픈 젊은이에게 록큰롤은 그 지긋지긋한, 나라를 망하게 한 어른들의 민요도, 또 망한 나라에서 태어나 새 나라에서 주인 신세하는 뽕짝도 아닌, 제 3의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록큰롤은 백인들이 들고 들어와 백인 것인 체 하지만 실은 미국의 노예들, 흑인들이 하던 음악이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그 속에는 공감의 씨앗과 끈이 들어 있었다.
1960년대의 신중현은 뽕짝에서 완전히 벗어난 멜로디와 코드 전개를 갖춘 우리식 록큰롤을 작곡했다. 다시 말하면 록큰롤을 우리 ‘노래’의 범주로 편입시킨 것인데, 이것은 큰 업적이다. 미국의 히피 운동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한 체험을 한 30대의 그는 1970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자기를 바라본다. 엄밀히 말하여 록큰롤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하긴 무엇이 결정적으로 나의 것이겠냐마는, 그는 록큰롤 속에 자기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것이 ‘엽전들’ 시절의 그이다. 그는 록큰롤 속에서 장타령을 발견했다. 아니, 그 둘을 연결시켰다. 그렇게 하고는 그 거울 속에서 자기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자기는 아니었다.
결국 그의 귀와 손과 목청은 ‘정처 없음’의 긍정 속에서 자신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김삿갓> 같은 최근작을 보면 그것이 확인된다. 여전히 우리의 귀는 정처 없다. 젊은 친구들은 사실 더 그렇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그것들을 인식하고 확인하며 처절하게 텅 빈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정말 우리 록이 할 일이다. 그 정통성을 세운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신중현이다. 그래서 실은 그를 바라보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다. 착잡함. 그가 록 음악의 대부인 것은, 4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해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은 <<매경 시티>>에 게재 예정인 원고를 본 홈페이지를 위해 미리 기고해준 것이다.
* 록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이자 대중음악 평론가로도 활동중인 성기완 시인은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외에, <<재즈를 찾아서>> 등의 대중음악 관계 저서 및 역서들을 펴냈다.
(200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