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칼럼] 심연에 대한 이해의 비평 |임우기|

왕왕 오해하고 있듯이 작품 속에 담긴 주제 의식은 그 작품을 창조한 작가 의식과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제 의식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 일 뿐 작가 의식의 심연이나 그늘에 의해 변질된다. 그 변질의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작품의 주제를 깊이 이해하는 길이다. 당연히 작가 의식의 심연은 쉽게 눈에 잡히지 않는다. 미시적 독서가 필요하고 때론 심독(心讀)이 요구된다.
가령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민족, 생명, 일본, 한(恨) 등의 큰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주제들은 여러 이야기 줄기들에 의해 흥미롭고도 강렬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큰 주제들을 끌고가는 이야기들의 주요 모티브를 깊이 살피면 그 주제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다른 심연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토지>>의 주요 모티브가 간통이나 치정(癡情)이라는 점이 그렇다. 간통과 치정에 의해 이야기의 흥미는 점증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증오와 대립의 심리학이다. 악인(惡人)에 대한 집요하고도 탁월한 묘사, 작중 인물이나 분위기 묘사의 기세(氣勢), 돌출된 문장 등의 분석을 통해 <<토지>>의 주요 모티브인 간통과 치정의 심리학은 더 설득력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토지>>의 주제 의식은 겉과는 다른 속모양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투박하게 말해 <<토지>>의 주요 테마인 민족주의, 일본, 생명, 한은 그간 비평가들에 의해 인문학 혹은 사회학적인 일반론의 수준에서 미화되어 왔고 대체로 그럴만 하지만, 그 <<토지>>의 테마엔 일본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서의 민족주의, 인간을 믿지 못하는 배타적 생명론, 응어리로서의 한의 성격이 짙게 깔려있다. 이는 작가 의식의 평화롭지 못한 심연이 주제 의식을 늘 간섭하고 개입하기 때문이다. <<토지>>의 경우, 이러한 작가 의식의 밑바닥에 자리 틀고 있는 독한 피해 의식과 증오, 두려움과 집착의 정서형들, 간통과 치정의 심리학이야말로 이 거대하고도 탁월한 작품을 낳은 근본적인 힘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주제 의식에 대한 작가 의식의 그늘의 간섭과 개입을 이해하는 독서가 바로 작품의 겉과 심연을 한몸뚱어리로서 체험하고 이해하는 길이다.
김지하 시인의 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김지하 시세계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대체로 반독재 저항성과 생명 사상성으로 집중되어 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김지하 시의 주제를 내세우는 것은 인간의 삶이나 문학을 위해 별 도움이 안된다. 김지하 시는 시인의 심연의 이해를 통해 그 주제들은 새로이 거듭나야 한다. 그 심연 중의 하나는 김지하 시의 리비도 혹은 성(性)에 대한 이해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김지하 시의 심연은 성적 콤플렉스를 심히 앓고 있다. 가령 김지하의 시 <쉰>이나 <무화과>에서 분명하기 드러나듯이, 여성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동경이 너무 커서일까 그로인해 일어나는) 공포, 자신이 남성이면서 여성이라는 양성 의식, 자궁 속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성인 남성의 복잡한 내면 의식(자궁 속에서 세상을 내다볼 때 비록 아늑하지만 다른 남성적 세계에 대해선 매우 공격적 불안의식을 안고있다!), 무화과(無花果) 의식 …
이런 잠재된 심연들은 사실상 김지하 시 초기부터 90년대 시까지 두루 걸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지하 시의 정치적 저항성이 여성성에 대한 결핍과 동경과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슴을 암시한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여성적 지향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 문체의 남성적 공격성이나 논리 전개의 근대주의적(남성주의적) 관념 성향이 농후한 것, 또는 김지하의 확대지향적(특히 고대사에 대한 그의 민족주의적 사유) 민족주의는 그의 시의 심연의 성적 결핍이나 상처와 일정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런 작가 의식의 심연을 추정하고 분석해 감으로써 김지하의 시적 주제에 대한 판에 박힌 평가들은 새로운 차원으로 변환될 수가 있을 것이다.
노파심으로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런 심연에 대한 이해는 ‘참새구이감’들이 지저귀듯 작품에 대한 트집잡기가 아니다. 또한 과학주의적 분석지상주의자들이 외면하려 애쓰듯이 비과학적 추정주의(推定主義)도 아니다. 우리가 작가 의식 속에 드리운 희미한 그늘이나 심연의 상처를 어림잡기식으로나마 찾으려 애쓰는 것은 문학 작품을 심연이 살아 있는 따뜻한 생명체로서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다. 병든 심연과 결핍의 그늘을 이해함으로써 문학 작품과 우리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는 길 위에 비로소 서게 된다.
이제 문학에서 상투적 분석이나 흔한 비평적 미담(美談)은 그만두어야 한다. 병증(病症) 또는 추악(醜惡)의 심연은 비평가의 첫사랑이다. 비평가는 정신과 의사로서 비로소 자기 일을 시작한다. 그는 진지한 정신과 의사로서 작품과 대면한다. 나아가, 더 더, 사랑하는 당신인 작품과 내가 함께 병듦과 함께 앓음을 확인키 위해 나는 당신의 어두운 역사와 심연을 찾아 헤맨다. 당신의 추악을 혐오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당신의 낯선 추악 속에서 나의 추악을 읽어내고 반성한다. 낯선 추악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내 추악도 극복되지 않는다. 당신의 낯선 추악을 고치기 위해 당신의 추악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나는 내 삶이 기꺼운 시약(試藥)이 되어야 함을 안다.
당신인 작품과 내가 공유하는 추악은 비록 심각한 것이지만, 심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병든 심연은 밝고 따스한 빛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 어둔 해저(海底)의 탐색으로부터 솟아나는 훈훈하고 환한 블랙 유머의 비평이 그립다. 이때 어두운 바닥에 대한 이해의 비평은 마침내 ‘온삶’에 대한 비평, 감히 말해 ‘사랑의 비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솔출판사 대표인 평론가 임우기는 평론집 <<살림의 문학>> <<그늘에 대하여>> 등을 펴냈다.
(200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