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Two of us |신수정|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그녀는 막 23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 전 해 엄마는 자신보다 8살이 많은 여고시절 선생과 결혼했다. 무슨 특별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두가 대수롭잖게 여길 정도로 별 일 아닌 것만도 아니었다. 엄마는 곧 그녀의 동창 사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지금도 엄마가 동창회에 가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그녀의 결혼이 보수적인 지방도시에 끼친 (악)영향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이 ‘인기짱’인 남자였단 말인가. 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그 여학교의 단 한 명뿐인 총각선생이었다. 이 말은 그가 총각선생이라는 범주로 분류되는 한에서만 여학생들의 환대의 대상일 수 있었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엄마는 자주 그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둘 사이에 결단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한다. 진짜 연애는 사제지간 이후였다는 것이다. 누가 물어봤나. 어쨌든 엄마가 그토록 그 점을 자주 강조한 것은 부끄러움 때문일 수도 있고(어쨌든 ‘특이’하고도 ‘진부’한 이야기니까)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딸년이 자신의 스토리를 반복하면 어쩌나하는). 생각해보면 후자 쪽이 좀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대개의 경우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나 연애의 환멸과 그에 따르는 ‘여자의 일생’ 류의 회한,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계몽조의 훈계로 끝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문제에 관한 한 엄마는 애초부터 그렇게 교훈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그런 정도의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만큼 인생에 대해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때 나의 가장 큰 소원이 여름 하복을 입을 때 끈으로 된 런닝셔츠를 입는 것이었을까.
엄마는 그녀의 남편이 보낸 백 여 통 가량의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희, 희를 보면 언제나 코스모스가 생각나오”라든가 “오늘 같은 밤에는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듣고 싶구려” 따위로 끝나는 그녀 남편의 편지는 당시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따위의 문장에 경도되어 있던 나에겐 아무런 흥취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 동안 그 편지가 엄마의 ‘선녀옷’ 노릇을 톡톡히 해낸 것은 사실이다. 일찍이 인생의 정열이 어떻게 낭비되고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깨달은 나는, 후일, 편지를 보내기는커녕 만날 때마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비난만 일삼던 남자랑 홀라당 결혼해버림으로써 내 감상의 일단을 피력한다.
사실, 우리의 공조체제는 언제나 구멍이 많은 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반대표로 교내콩쿨대회에 나가게 됐다(정말이다). 엄마는 콩쿨에 대비해 혹독한 조련사역을 자임했다.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코피 정도는 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아무래도 노래만 하기에는 밋밋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곧 율동을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엄마가 손을 오른쪽으로 흔들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흔들면 또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흔드는,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원 같은 고급한 어린이들이 주로 구사하던 첨단의 기교를 추가했다.
드디어 콩쿨이 열리던 날, 엄마는 무대 앞쪽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무대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엄마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초반까지는 좋았다. “빨강빨강 종이론 무얼 접을까~ 파랑파랑 종이론 무얼 접을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제, “빨강빨강 종이론 예쁜 꽃 접고~ 파랑파랑 종이론 예쁜 새 접지~”를 할 차례였다. 그런데 무대 앞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손을 왼쪽으로 흔드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흔들어야하는 타임이었다. 순간 나는 그만 혼란에 빠져버렸고 그 바람에 한 박자를 놓쳤으며 급기야 그만 가사를 까먹고 말았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판가름났다. 이후, 지정곡으로 선정된 또 다른 곡의 반주가 끝날 때까지, 나는 무대 위에서 홀로 침묵하며 서있었다. 선생님이 한 곡이 끝난 다음 그 다음 곡을 잘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다시는 노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콩쿨이 뭐, 올림픽경긴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 해서 내 실수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완벽한 실수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 날,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는 손을 든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본 것은 무어란 말인가. 나는 분명히 엄마가 손을 드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때로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인생의 알 수 없는 곡절, 우리가 흔히 ‘생의 기미’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엄마와 내가 함께하는 우리의 사업이 그다지 전망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도 엄마는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려나, 우리는 오래된 파트너가 아닌가. 엄마는 능숙하게 몇 해 전 퇴직한 그녀의 남편의 늘어가는 잔소리와 반찬투정 등을 흉보는 한편 은근하게 그녀의 남편의 외손주를 돌보는 일의 고단함과 성가심을 토로했다. 이런 정도의 공격이라면 매뉴얼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노골적으로 퉁명스러운 얼굴의 비난만 일삼던 남자의 게으름과 무심을 성토하는 한편 재빨리 엄마의 자랑인 그녀의 아들 들어 엄마의 교육열이 이룬 혁혁한 전과를 칭송하며 자식을 유기한 어미의 죄책감을 면피하려 들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나는 이제 엄마의 남편의 외손주가 엄마의 아들에 버금가기만을 고대하는 것 외엔 아무런 희망도 없노라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가 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뭐가 문젠가. 아직도 무언가 더 남았다는 건가. 도무지 어떻게 수지를 맞추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는 게 이 사업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이르면, 엄마의 그 대책 없는 우둔한 열정에 그만 가슴 한쪽이 찡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엄마에겐 실로 아쉬운 일이겠지만 그나마 나에겐 진실로 다행인 것은 나에겐 나 같은 딸년이 없다는 점이다. 지 에미의 살을 파먹고 미주알고주알 흉을 보는 딸년이란 인생의 고리대금에 다름 아니다. 나에겐 몹시도 아쉬운 일이지만 엄마에겐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것이 이 결론에 대해 내가 더 이상 가타부타할 말이 없어진 것임은 덧붙일 필요도 없겠다.

*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평론가 신수정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신인의 탄생> 등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다.
(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