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이성복|

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창 밖을 바라보는 개의 뒷모습
축 쳐진 귀바퀴에
굽은 등뼈가 산허리를 닮은 개
두 겹의 배가 뒤에서도 보이고
펑퍼짐한 엉덩이가 무거운 개

개는 붉은 의자에 올라앉아
창 밖을 내다본다
창 밖엔 흰 구름이 브래지어 끈처럼
걸쳐 있고, 하늘은 푸르다
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개가 돌아앉아
창 밖을 내다보는 곳이
당신 방이라는 것을 아는가
대체 개의 머리는 바라보는 일에 무력해서
저렇게 비스듬히 세워진 몸뚱아리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개의 위와 식도와 창자가
고무 호스처럼 포개어진,
누르스름한 물컹한 다라이 같은 개의 뱃집이
창 밖의 풍경을 빨고 삼키고 주물텅거리며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는 거칠거나 표독하거나
신경질적이지 않다
개의 불룩한 배와 축 쳐진 귀가
그렇게 일러준다
하지만 곧추 세운 개의 허리는
개의 의지가 우둔하고
완강하고 뻔뻔하게 그의 삶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장이라도 당신은 다가가
쓰다듬어 주고
반들반들한 털 속으로 손을 넣어
긁어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당신의 몸집보다 두 배는 더 굵은 개가
당신이 앉는 붉은 의자에 죽치고 있을 때
당신은 개를 불러 내려오게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
퍼질러 앉아 휴식을 취하는
개에 대한 예의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개가,
웅크리고 있는 개가
당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 구름이 브래지어 끈처럼
내걸린 창 앞에, 이해할 수 없는 푸른 하늘 앞에
당신의 일부가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을
당신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부가 불가사의한 풍경 앞에,
난해한 오후의 햇빛 앞에 바보같이, 멍청하게
뭔지도 모르는 멍한 시선으로,
일어날 줄 모르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메리, 메리 혹은 쫑, 쫑 하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개를 부르지 못 한다
볼펜이나 담배갑을 집어던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개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부르는 것이므로
당신이 당신을 부르려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어야 하므로
당신은 의자를 잡아 흔들거나
발길질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맥박이 빨리 뛰고 가슴이 두근거리는데도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두 겹의 뱃살과 축 늘어진 귀바퀴로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는 개가 당신 자신이므로

지금 브래지어 끈처럼 내걸린 구름이
군데군데 잘려 나가는 오후의
하늘을 바라보는 개,
그 뒤에는 당신이 있다
고요한 경악과 더듬거리는 혀와
명치끝까지 올라오는 아득함이 있다

이곳은 당신의 방이다
당신은 이곳에 잘못 들어왔다
이곳은 당신의 방이다
단연코 당신은 잘못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방문을 열고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아 버린 것이다

* 계명대 문창과 교수인 이성복 시인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 이르는 4권의 시집과,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200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