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서울 생각 |고종석|

서울은 그리 사랑스러운 도시가 아니다. 적어도 걷기에 썩 마땅한 도시는 아니다. 공기도 맑지 않고, 소음이 지나치고, 숲이나 공원 같은 휴식 공간이 거의 없다. 게다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이 볼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애향심이라는 것이 꼭 합리적 연산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별로 떠나본 적이 없는 이 도시에 나는 요즘 새삼 애착을 느낀다.
가끔 종로통을 걷는다. 그러니까 종로, 신문로, 세종로 가장자리가 내 산책로다. 내가 서울에서 특별히 그 언저리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직장이 안국동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종로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낡고 적당히 시끌벅적한 이 구역을 나는 그럭저럭 좋아한다. 종로는 이제 서울의 한복판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곳도 아니다. 강남이 아니더라도, 요즘의 젊은이라면 홍대 앞이나 동숭동을 더 즐겨 찾을 것이다. 밀레니엄 플라자가 자리잡은 종로타워처럼 새롭고 요란스러운 건물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종로는 아무래도 옛 거리다. 그래선지, 종로를 걷다 보면 옛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생각이.
종로에 살아본 적은 없다. 하긴 서울 시민 가운데 그 대로변에 살아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 말은 내가 종로구에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종로구라고 해서 다 종로의 분위기가 배어있는 것은 아니다. 자하문 너머의 세검정쪽은, 비록 종로구이기는 하지만, 종로의 분위기가 거의 없다. 그 곳은 차라리 서대문구나 성북구에 가깝다. 관공서나 어수선한 상가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홍제동에서 문화촌과 세검정을 거쳐 정릉에 이르는 길에서는 정조의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곳은 내가 살아온 곳들을 닮았다. 내가 살아온 곳은 용산, 마포, 신촌, 돈암동, 응암동 그리고 강남 같은, 고전적 기준에서 보면 변두리지역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종로에 가는 것은 유년기때나 지금이나 ‘마실 가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손윗사람들의 소맷부리를 잡고 종로를 걸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 나들이는 주로 지금 종로 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이 건물이 헐린 지는 꽤 오래 됐는데, 지금도 그 앞의 버스 정류장 이름은 ‘화신 앞’이다)이나 그 건너편의 지금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신신백화점으로 쇼핑가는 어른들의 ‘깍두기’ 자격으로 이뤄졌던 것 같다. 신문로에 늘어서있던 의족 의수 판매점들의 ‘고무다리’ 간판이 어린 나에게는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었다.
혼자 종로에 나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나서였다. 내 종로나들이는 종로2가의 종로서적과 양우당에서 시작되었다. 고작 1,2층을 쓰고 있던 종로서적은 교보나 영풍 같은 초대형 서점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책방이었다. 한 층만을 쓰던 양우당도(거기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고려당과는 달리, 양우당은 제과점이 아니라 서점이었다) 동네의 소규모 서점만을 보았던 내게는 충분히 황홀할 만큼 컸다. 1970년대 초의 종로서적에는 남자 직원이 없었다. 물론 관리직 사원들은 남자였겠지만, 매장에는 남자 직원이 없었다. 대체로 20대 초반으로 보였던 그 여성 직원들의 향기가 지금도 은근하다. 은근하다? 은근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써도 되나?
내 발걸음은 이내 청계천의 헌책방 거리와 광화문의 ‘중도전’(중앙도서전시관의 준말.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서점이다)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종로서적에서 중도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들르곤 했던 광화문의 냉면집(이라기보다는 분식집이었는데) 선다래나 당주당을 생각하면 지금도 혀에 침이 고인다. 그 시절의 분식집 옥호로 지금도 남아있는 것은 미리내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 미리내도 지금은 쌈밥집 이름이 됐지만. 종로2가의 로얄제과와 광화문의 덕수제과에도 내 발길이 더러 머물렀다.
아주 짧았던 고등학교 시절, 광화문에 있던 ‘학생의 집’이라는 델 꽤 자주 들르곤 했다. 유신 시절에 그런 곳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그 ‘학생의 집’이라는 곳은 이름 그대로 중고등학생들이 드나드는 카페 비슷한 곳이었는데, 실내가 늘 연기로 자욱했다. 이를테면 불량 공간인 셈이었다. 그런 만큼 출입구도 찾기 어려워, 십대들은 알음알음으로 그 집의 고객이 되고 있었다. 그 집의 우량 고객이었던 내가 특별히 불량스러운 학생은 아니었으나, 순간적인 불량함을 자제하지 못해 학교에서 내쳐지게 되었다.
어린 낭인 생활로 천국에서의 한 철을 보내다가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을 때, 종로는 내게 학원의 거리로 다가왔다. 대일학원, 제일학원, 경복학원, YMCA 학원 같은 단과반 학원들과 종로학원, 대성학원, 정일학원 같은 종합반 학원들이 종로 언저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밤이면 단과반 학원들 근처는 까까머리 고등학생들과 더벅머리 재수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글자 그대로 인파(人波)에 실린 내 몸은 미지의 미래 앞에서 시큼들큼한 불안으로 바들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청계천 어딘가에 있었던 청소년회관이라는 곳도 내 잦은 출입처였다. 그 건물에 무료 도서관이 있었는데,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그 곳으로 출근해 신문 잡지와 대중소설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곤 했다. 청소년회관이 지겨워지면 신문로의 4.19 도서관으로 출입처를 바꿨다.
그 시절, 여고생 스타 임예진은 나의 한 우상이었다. 임예진씨는 결국 연기자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0대 때는 정말 예뻤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연상의 고리가 묘해서, 나는 청소년회관이나 4.19도서관을 회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임예진씨 생각이 난다. 그 곳에서 그녀를 그리워했었나보다. 내가 도서관의 붙박이였던 것은 아니다. 주머니에 1000원짜리가 들어오면 참다방이나 연다방으로 출근했고, 10000원짜리가 들어오면 맥주홀 꽃잎으로 출근했다. 다 종로 언저리에 있던 위락 시설들이었다.
최근에 이수태라는 이가 쓴 <<어른 되기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읽었다. 참 오랜만에 읽어보는 단아한 글들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노오트>>라는 책과 재회했다. 정치근이라는 이가 쓴 이 책을 저자는 아련한 마음으로 회억하고 있었다. 정치근 선생은 서울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학원 강사 생활도 오래 한 분이다. 나도 그 책을 읽으며 현기증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중2때였다. 이수태씨의 책에서 <<젊은 날의 노오트>>와 다시 만났을 때 내 마음은 아스라한 달콤함으로 떨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 책을 읽어도 내가 중학생 때의 현기증을 다시 체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의 결 위에 두껍게 쌓인 세월의 먼지는 아마 그런 호사를 방해하리라.
나는 <<젊은 날의 노오트>>를 종로서적에서 샀는데,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정선생의 또 다른 책 <<학생과 건강>>에서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일생동안 건강을 위해 꼭 해야 할 것으로 냉수마찰과 건포마찰을 들었고, 꼭 피해야 할 것으로 술과 담배를 들었다. 그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정선생이 하라는 것은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구태여 하며 불건강한 삶을 살아왔다. 술을 배운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지만, 담배를 입에 물기 시작한 것은 중3때부터다. 내가 <<학생과 건강>>이라는 책을 산 것은 중학교 1학년때다. 청계천의 헌 책방을 순례하다가 그 책에 우연히 눈길을 빼앗겼다. 벌써 31년 전이다, 라고 쓰고 보니 나도 이제 젊음에서 꽤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겠다, 라고 쓰고 보니 이인성 선생의 히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서울의 거리를 걸을 때, 덧붙일 관형어를 찾기 힘든 어떤 행복감이 내 온몸에 번진다. 그 행복감이란 결국 정겨움일 것이다. 이 도시의 불결한 공기에는 내 유년기의, 내 청년기의 희로애락애오욕이 흩뿌려져 있다.

*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이고 한국일보 편집위원이기도 한 고종석은 소설집으로 <<기자들>>, <<제망매>>를, 한국어에 관한 에세이집으로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등을 펴냈다.
(200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