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창자 없이 살아가기 |최수철|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 이런 부분이 있다. 열대 지방의 교역을 위한 전진기지에 나가 있던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열병이나 이질 따위의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중 독창적인 데는 전혀 없어도 몸이 건강한 탓에 상례적인 일을 꿋꿋이 해나가는 사람, 작가는 그를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아예 창자가 없어야 해.”
사실, 나는 지금까지 에세이 류의 글을 쓸 때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인용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내 창자도 게걸스러워졌는지 아니면 잡식성으로 변했는지, 남들의 글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마구 집어삼키려 한다. 아마도 새삼스레 그런 충동을 가라앉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하튼 콘래드 소설의 그 인물이 한 말은 내게 섬찍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창자 없이 사는 삶, 창자가 없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삶. 그렇다면 요즘 세상에서는 뭐가 없이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게 될 것인가.
그 동안 나는 이런 세상에서 제대로 글을 쓰려면 남들과 달리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해왔다. 그런데 콘래드를 읽고 나서 질문이 바뀐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제대로 글을 쓰려면 남들과 달리 무엇이 더 없어야 할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암흑의 핵심’ 혹은 ‘암흑의 오지’라고 번역되는 콘래드 소설의 제목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을 사는 일이나 문학을 하는 일은 어떤 양태로든 궁극적으로 삶의 핵심을 겨냥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제 지구상에 더 이상 암흑의 오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오지와 더불어 핵심도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믿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그리하여 핵심이 없는 세상이므로, 우리는 흔히 배알도 없이 산다거나, 아무 생각 없이 마치 뇌가 없는 듯이 산다고, 자학적이면서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한다.
하지만 콘래드가 암시하는 바처럼. 오지를 탐사하며 그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행위는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신비로운 영역을 백일하에 드러내버리거나, 심오한 핵심의 정체를 과학의 틀로 포획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다소 거창하게 말하여 자연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을 우리 스스로에게 불러일으키고, 인간 내면의 근원적 핵심에 다가서려는 불가능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모색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할 것인가. 현대인은 머릿속과 뱃속에 든 창자의 소화력을 과신하고 있거나 혹은 그 반대로 창자에 대한 믿음을 전혀 가지지 못하여 편식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핵심과 오지는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 없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콘래드가 말한 바처럼, 지금 이곳에서 우리도 창자가 없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창자의 까다롭고 불온한 공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세상의 다양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그것들과 온몸으로 하나가 되며 꿋꿋이 버텨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뇌 없이 산다는 말이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저의를 가진다고 한다면, 창자 없이 산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겸허한 수용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성의 지평을 넓히려는 긍정적이고 방법적인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창자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의 온몸이 온통 거대한 창자가 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터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창자를 대신하고, 그 새로운 창자로 이 시대의 풍토를 소화한다면, 제대로 사는 일과 제대로 글을 쓰는 일이 그리 어렵게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 한신대 문창과 교수인 소설가 최수철은 <<공중누각>>에서 <<매미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의 소설집, 장편소설을 간행하였다.
(200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