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단장(斷腸)의 언어 |우찬제|

진(晉)의 환온(桓溫)이 촉(蜀)으로 가던 도중 삼협(三峽)을 지났을 때의 일이다. 수행원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 배로 가져 왔다. 어미 원숭이는 뒤를 쫓아왔지만, 물이 가로막혀 배 위의 새끼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어미는 언덕에서 슬피 울었다. 어미의 울음소리에 아랑곳없이 배는 달려갔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는 배를 따라 계속 강기슭을 위태롭게 달리며 쫓아왔다. 천 리 남짓 갔을 때 배가 언덕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는 배 안으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명했다. 사람들이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가닥가닥 끊겨져 있었다. 너무나도 심한 슬픔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일러 ‘단장(斷腸)’이라는 말로 비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단장의 고통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잔혹한 대학살의 현장에서 그것은 뚜렷하게 전경화되었다. 굳이 대학살의 현장까지 가지 않고 희생제의의 현장만 보더라도 단장의 고통을 지피는 폭력적 형식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인류학의 보고에 따르면 인간은 나름대로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의 희생제의를 치뤄야 했다. 신의 노여움을 풀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양이나 소 등 짐승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지만, 사람을 직접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특히 어린 아이를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구약성서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으로써 자신에 대한 순종심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를 불쌍히 여긴 하나님에 의해 이삭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을 배신한 세 왕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그런 사랑이 베풀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또 전쟁과 관련하여 승자의 희생제의로 포로들이 바쳐지는 경우도 많았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만 보더라도,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가 전사한 동료 파트로클루스를 화장하면서 트로이의 포로 12명을 함께 단에 올려 불태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 상나라에서도 왕의 죽은 조상들을 위해 강나라 포로를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400명에 이르기까지 소, 양, 염소와 함께 희생제의를 치뤘다. 특히 왕이나 왕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자주 인간을 제물로 삼았다. 고대 중국이나 페루, 우간다와 다호메이 같은 아프리카 왕국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수메르의 초기 왕조 시대에 군주가 죽으면 그의 아내나 첩들을 비롯하여 요리사들과 많은 신하들이 장례식의 한 절차로 죽임을 당했다고, 『작은 인간』에서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보고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신공양의 한 형태가 고소설 『심청전』에 보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양미 삼백석을 주고 심청을 산 상인들은 임당수에 이르러 심청을 제물로 하여 제사지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뱃길의 안녕과 상운(商運)을 기원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장사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제의를 치룬 것이다.
성스러움을 입증하기 위해서, 권력과 명예를 보증하기 위해서,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서, 또 어떤 이유나 명분을 위해서 사람들은 종종 폭력적인 희생제의를 치뤄온 것이 사실이다. 외형적으로 볼 때 제물은 사람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돈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희생양에 대한 제의 주체의 위장된 폭력성은 꾸준히 유지되어온 게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전개 이래 물신(物神) 시대에는 보다 많은 돈의 축적을 위해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희생양으로 삼는 비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양상은 좀더 확대 심화되는 듯하다.
희생제의를 주관하는 주체 입장에서는 대상으로서의 희생양을 투자하여 많은 이익을 창출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대상으로서의 희생양 중심의 반성적 사고에 인색했다. 게을렀다. 그 결과 많은 희생양과 그 주변 사람들을 단장 심회에 젖게 했다. 주체 중심의 폭력적 욕망으로부터 타자에의 윤리학으로 우리의 관심사를 돌려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고통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행복한 상생의 지평은 단장 심회를 추체험하는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만 진정 꿈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서강대 문학부 교수이며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인 평론가 우찬제는 『욕망의 시학』, 『상처와 상징』, 『타자의 목소리』 등의 평론집을 펴냈다.
(2002.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