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회사’라는 것에 대한 오해 |김연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업의 수단으로 소위 회사라는 곳을 출퇴근하고 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회사란 것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약 25년 동안 회사를 다닌 사람으로서 이 자리를 빌어 회사가 무엇인지 아는 대로 조금 말해 보려 하니 혹시 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를 드나드는 사람들 중 취직 면접 가서 유사한 질문을 받게 되면 도움이 되기를…

1. 회사의 가장 발달한 모습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복거일의 <<목성 잠언집>>에 명쾌하게 설명이 나와 있다. 복거일에 의하면 회사는 재물이나 용역(서비스라고도 한다)을 만들어 내는 단체이지 소비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소비는 소비를 잘하는 단체에게 맡기고 회사는 이익을 창출해 내고 이를 재투자해서 경쟁력을 계속 키워 나가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제네랄 일렉트릭’의 회장을 지낸 전설적인 경영자 잭 웰치는 건강한 기업만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고 말하며 역시 기업의 이익을 강조하였고 기업의 사회 봉사는 기업 직원들의 자발적인 지역 사회 봉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신입 사원 선발 면접에 나온 많은 대학 졸업생들은 기업은 이익의 일부를(혹은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과감하게 사회 봉사―예를 들면 도서관을 건립한다든가, 수재민을 돕는다든가, 문화의 전당을 짓는다든가 등등―에 할애해야 한다고 한다. 왜 자유주의자 복거일이나 잭 웰치 같은 경영자는 이익을 강조하고 우리 학생들은 기부, 희사 이런 것들을 생각할까?
이것은 아마도 우리 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청교도적인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한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적인 기부를 하게 되고, 일반 대중도 그런 것이 은연중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복거일이나 잭 웰치가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이상적인 자본주의 즉 투명한 경영, 제한 없는 완전 경쟁 속에서 기업의 창의와 연구 개발, 이에 대한 정당한 성과의 획득, 이런 것들이 보장되는 자본주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2. 회사원이 되면 거대한 조직 속에 매몰되어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회사’라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라는 것의 문제이다. 사회생활을 해 나가자면 어떤 조직이든지 속할 수밖에 없고 조직에 속한 이상 일정한 정도의 (조직의 설립 목적과 관계 있거나 조직의 고유 문화에 기인한) 제한이 가하여 진다. 집단적 이해가 걸려 있는 정도가 심할수록 조직의 통제는 더 강해지는 듯하다. 문제는 회사라는 조직은 이익단체이기 때문에 어떤 정해진 일을 정해진 시각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팀웍을 이루어 해 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발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냐 하면 당사자인 개인이 치열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맞는 말이다.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하루에 여덟 시간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좋은 직장을 그만 둔 사례가 있고, 어떤 소설가는 신문 기자 생활 할 때 자기가 쓴 기사에 손을 대고 고치는 데스크 앞에서 기사를 찢고 신문사를 때려치운 사례가 있다.
반면에 그렇지 아니한 사례도 있으니, 조금 옛날에 <황무지>를 쓴 시인 T.S. 엘리엇은 영국에서 은행원으로 평생 잘 살았다고 하고,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인기 있는 어떤 미모의 소설가는 국가 공무원이라 하니, 조직의 느슨한 정도, 개인의 예술적 열정의 치열함, 조직에의 적응성 등등과 관련된 문제이지 어떤 한 가지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닌 듯.

3. 예술적 재능은 회사 일을 해내는 재능과 무관하다?

회사에 입사해서 어느 정도의 직위에 이를 때까지는 이 말이 옳다. 대개 조직의 하위 계층에 속하게 되면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 정도가 요구되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회사에서) 특별히 창의성을 요구한다거나 직관이나 관찰력을 요구하는 일이 잘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성실성이 최고의 덕목이다(그러나 이 경우에도 직관, 창의성 등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른바 ‘될썽 부른 떡잎’이다).
이러한 생활을 좀 하고 나면 조직 단위의 책임자로 임명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성실성보다는 창의성, 직관, 관찰력 등 예술가적 재능이 있으면 있을수록 유리하게 된다. 왜 이렇게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 현대 사회는 그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항상 그 전에 겪어 본 일의 반복보다는 새로운 일을, 경험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경우가 잦아지게 된다. 새로운 일을 옛날 방식으로 성실하게 처리해 나갈 수는 없지 않는가?
스스로 해법을 발견해 나가는 그 과정이야말로 시인이 이때껏 가져 보지 못한 시상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과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상의 벼락을 반복적으로 맞는 시인은 없으니까.
이런 몇 가지의 말로 ‘회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말할 수는 없으나 우선 큰 것만 말씀 드렸으니, 이 글을 읽고 가는 사람에게 유용함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

* 현재 교보문고에 근무하고 있는 시인 김연신은 시집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의 바깥에서>>를 펴냈다.
(2002.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