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건배 제의 |윤병무|

달빛이 없어도 좋아요
나의 눈은 침침해지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더 어두워졌으면 좋겠어요
사소하지 않은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말이에요

그대여 봄밤이면
風浴을 즐기러 들판으로 나와요 그러면
나는 바람, 나는 멀리 날지 못하는 무당벌레처럼
눈을 감고 두 팔 벌린 그대를 돌며
그대 체온의 안과 밖의 경계만을 가져갈게요 그러면
그대는 다시 그대 부피만큼의 체온을 그대 안팎에 채워놓고
나는 덜어내어도 금방 그대로인 그대의 체온을 가져가는
쓸쓸하게 행복한 일을 반복할게요
나의 떨리는 손가락을 붙잡아둔 바람의 손바닥이 손금의 결이
그대 온몸에 난 잔털 끝을 스쳐 지나가면
그대의 잔털은 暮色의 억새밭처럼 흔들리며 내가
그대 곁에 왔음을 알아내는 더듬이가 될 거예요

그래요, 그대여 아픈 봄밤이면
풍욕을 즐기러 들판으로 나와요
우리 청춘의 술잔도 이제 비워져가요
예전과는 달리 이삼십 년 전의 청승맞은 가요가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그대여, 이제 아스라한 잔을 들고 건배하시죠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의 붉은 포도주를 입에 문 채
그대의 마른 입술에 전해주고 싶어요

* 윤병무 시인은 시집 <<5분의 추억>>을 펴냈다.
(200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