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다른 것’과 ‘틀린 것’ |박혜경|

오래 전에 본 영화 중에 「뮤직 박스」라는 영화가 있다. 희미한 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줄거리를 대충 더듬어보면, 나치 정권 아래에서 비밀경찰로 활동했던 사람이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와 한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양민으로 위장하여 살아가지만, 결국은 변호사인 그의 딸에 의해 누구보다도 잔혹한 방법으로 유태인을 고문 살해했던 그의 흉악한 전력이 밝혀지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평범한 노인이 된 그 전직 비밀경찰이 매일 아침마다 손자를 데리고 팔굽혀펴기 운동을 하는 장면이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라는 말로 손자를 훈육하면서 손자와 함께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혹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유태인을 잔혹하게 고문하는 그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내가 어릴 때 많이 들었던 구호 가운데에도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것이 있었다. 국민 체력증진이라는 명목으로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노래와 함께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구령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게 하고, 국민건강이라는 명목으로 혼분식을 장려하며, 또 국민건강이라는 명목으로 만보걷기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기억들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온 다음 선생님의 지명에 따라 마치 로봇처럼 한 명씩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뜻도 모른 채 암송을 해대던 초등학교 때의 교실 풍경이나, 국기 하강식 노래가 울려나오면 길거리의 사람들 모두가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길거리에 서서 노래가 끝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장면들과 짝을 지어 떠오른다. 아마도 누군가의 눈에는 운동장에 모여 맨손체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구호에 살고 구호에 죽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각종 대중매체에서 수시로 쏟아지는 캠페인성 프로그램과 길거리에 숱하게 걸려 있는 현수막들이라고 한다. 여전히 국민들은 계속해서 가르치고 지도해주지 않으면 필경 나쁜 길로 들어서고야 말 ‘건강하지 못한 육체에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지닌’ 문제아들인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홀로 건강한 건 건전 사회를 외쳐대는 저 구호뿐인가? 그렇다면 그 구호는 손자에게 정신과 몸의 건강을 훈육하며 아침마다 팔굽혀펴기를 해대는 저 신념의 우람한 팔뚝과 얼마나 다른가?
좀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나치 정권이 건강사회 유지를 위해 유태인과 병자, 장애인, 흑인, 공산주의자들을 솎아내었듯이, 건강함의 이데올로기는 종종 건전사회 구성에 장애가 되는 사람을 가르는 폭력적인 장치로도 작용한다. 이 경우 그 구분의 기준이 되는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배제의 기준으로 전이된다. 우리와 ‘다른 것’은 곧 ‘틀린 것’, 혹은 ‘잘못된 것’이라는 가치 기준에 의해 사회적으로 유해하고 불건강한 존재로 규정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를 참아내지 못하는 걸까? 아니, 우리는 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 내부의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 규정된 욕망들을 자발적으로 억압하고 솎아내어, 기어이 건강하고 모범적인 시민이 되어야 하는 걸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건강함이 바로 우리 사회가 지닌 정신의 획일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말이다.

* 계간 <<문학과 사회>> 편집동인인 평론가 박혜경은 비평집 <<비평 속에서 꿈꾸기>> <<상처와 응시>> <<문학의 신비와 우울>> 등을 펴냈다.
(200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