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칼럼] 에두름에 대하여 |심재상|

더디디 더디게 우리에게 오는 것들, 느리디 느린 속도 속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있다. 아니, 느림 그 자체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혹은 느림 그 자체의 리듬과 한 몸뚱이가 되는 순간에만 우리의 몸 안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속도가 한사코 지워버리는 어떤 것들, 속도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 사실 속도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어떤 집중력이 단지 시야의 좁혀짐이라는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속도는 세계의 깊이와 내면을 제거해버리고, 바로 그 방식을 통해, 모든 것을 오락과 소모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일직선의 길을 활짝 열어놓는다. 곧게 펼쳐지며 내달리려하는 두께 없는 삶-길 위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게 만드는 삶-길의 마디와 옹이와 매듭들의 미덕,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짐짓 휘어지며 늘어지는 말-길의 구절양장, 그 아흔아홉 구비의 음덕이 바로 거기 있다.
올 초에, 4차선으로 확장되어온 영동고속도로의 마지막 대관령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울-강릉간은 세 시간의 전망 안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숱한 어려움과 난관을 돌파하여 7개의 길고 짧은 터널과 숱한 교량으로 완성된 일직선의 길―그 기적을 실현시킨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꿈, 우리의 <거기>, 우리의 마지막 <자연>을 지금 당장 ‘즉각적으로’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우리 모두의 안달 섞인 욕구와 의지의 강렬함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 경포해수욕장은 동해바다까지 단숨에 내달려온 일군의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점령당하였다. 그들은 푸르른 물속에 흠뻑 잠겨드는 대신, 흰 모래밭을 늘씬한 몸매의 보여줌/바라봄의 공간, 시선/욕망의 소비의 공간으 바꾸어놓았고, 그렇게 <거기>를 ‘동해안에서 가장 물 좋은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덧 저녁이면 은밀하게 가을 기운이 느껴진다. 매듭 없는 시간들, 미끈하게 흐르는 세월. 그런데, 그 서늘함 속에서, 무엇인가가 문득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잠시 멈칫대다가, 켕기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나는, 돌아본다. 돌아보아선 안 되는 어떤 것들, 돌아보려고 해선 안 되는 어떤 것들, 돌아보는 순간에 바로 그 돌아봄 때문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어떤 것들… 그렇게 18년 전의 내가 썼던 작은 글 하나가 ‘시대착오적으로’ 나를 가로막는다.
<< 버스에 갇힌 채 몇 시간, 이윽고 하늘에 맞닿은 고갯마루를 휘감아 도는 순간, 당신은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또 하나의 하늘과 그 아래 얇게 펼쳐진 푸른 바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낮게 누워 있는 그 도시를 발견할 것이다. 혹은, 모처럼 밤 기차에 몸을 싣고 그 단조로운 철거덕댐의 강보에 싸인 채 졸다 끄덕이다 불현듯 깨어나 성에 어린 창 귀퉁이를 입김으로 녹여 보며 우르릉 우르릉 수많은 삶의 터널들을 하염없이 빠져나가노라면, 문득 불붙은 아침바다에 이르고, 그 곁에 잠들어 있는 환상과도 같은 그 도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매번 그럴 것이다. 아무리 거듭되어도 그 만남은 언제나 원초적인 순수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만나게 될 그 풍경들이 가히 우주적(宇宙的)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 풍경들의 진정한 주어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해도 좋겠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언젠가 한번은 만나기를 늘 바라 왔던 어떤 풍경, 이윽고 길을 떠나 그 길고 고단한 여행을 통해 차체(車體)의 단조로운 소음과 진동 속에서 암암리에 조금씩 자신의 내면에 증폭시켜 온 어떤 바람―그렇다, 그 도시는 하나의 풍경으로 구현된 당신의 꿈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독단적이기까지 한 상상력의 체제 속에서, 태백산맥을 넘지 않고서는 그 도시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그 누구도 바다로부터 그 도시에 ‘상륙’할 수는 없을지니, 그 도시는 바다보다도 더 낮은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한 마디로 바다의 심연, 바다의 내면성이다.
그런 까닭에 그 도시는 어쩔 수 없이 생활보다는 삶이 문제되는 곳, ‘아니마’가 ‘아니무스’를 품에 안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여성화한다. 모든 것이 거기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느리고 부드럽게 다가오고 다정하게 지나간다. 시간마저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그렇다, 자신의 삶이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 시간을 절약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남아도는 시간을 과연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면서, 우리 모두가 시간을 아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그 도시의 존재는 지극히 ‘교육적’이다.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그 도시가 휴양지 특유의 풍토를 담뿍 머금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거기는 우리의 메마르고 피폐한 영혼이 오랜 갈증을 축이고 깊이 휴식하는 곳이다. 거기는 도시적 삶에 부대끼며 사는 한 시인, 칼날 같은 자의식에 시달리는 한 영혼이 ‘환상’이라고 행복하게 부를 수 있었던 곳이다. 거기는 <여기>에서 우리가 꿈꾸는, 이 땅 위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거기>이다.
그 도시를 휩싼 채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 그것은 세계의 가장 낮은 곳을 채우고 있는 깊고 무거운 물―‘망각의 강’!―일까? 죽은 사람의 영혼은 수십 리에 걸친 열사(熱沙)의 사막을 맨발로 가로지른 다음에야 망각의 강에 이르게 된다고 플라톤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모래밭을 걸으며 갈증과 기갈을 키울 대로 키운 인간들은, 저만치 앞쪽 열기로 아른대는 대기 속에 홀연 출렁이는 강 하나가 신기루처럼 나타났을 때,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벌컥벌컥 앞 다투어 강물을 들이킬 것이다…
그처럼, 모든 망각과 휴식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원초적인 사막이 있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진실로 우리가 그 도시로 내려갈 수 있기 위해선, 버스로 혹은 밤 기차로 우리의 고통과 지루함을 한껏 키워 줄 하나의 사막, 하나의 험준한 태백산맥이 필요한 것이다.>> (1984)

* 관동대 불문과 교수인 심재상 시인은 시집 <<누군가 그의 잠을 빌려>>를 펴냈다.
(2002.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