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검은 소설’이 보내다 |김종호|

1.
검은 가방은, 사산(死産)하는 짐승처럼, 나를 강물에 쏟아냈다. 검은 가방에 휘발유가 뿌려지고 태워졌다. 나는 유기 되었다. 꿈의 한 가운데. 상처가 검게 썩어갔다. 아무도 그 상처를 감싸주지 못했다. 나는 흘러가네, 멀리, 죽음조차 쫓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흘러가네,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 죽어 흘러가네, 옴. ……죽음,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텍스트.

2.
소설 이전의 ‘검은 소설’을 나는 꿈에서 어렴풋이 봤다. 내가 쓴 그 소설은 놀랍게도 나의 기억에 없는 작품이었다. 책이나 서류뭉치로 보이는 그것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지만, 칠흑처럼 어둡지는 않았다. 마치 낮과 밤의 경계와 같은 어스름어둠과 같은, 이런 것을 어떻게 특정한 색으로 명명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도록 고요했으며 어느 곳에도 기대지 않고, 그렇다고 허공에 뜬것처럼 불안해 보이지도 않고, 그 스스로의 어둠으로 주위의 공간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결코 말하지 않고 곧장 머릿속으로 덮쳐 왔다. 나는 이미 ‘검은 소설’이 ‘내가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기억에는 없다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쓴 것이었고, 그것은 두 겹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면의 ‘검은 소설’은, 잊혀졌거나, 의식의 저 너머로 축출되었거나……. 마침내 모든 감정들의 굴곡을 거쳐 너에게서 거리를 두자 검은 소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스름어둠이 어느새 나를 삼켜버렸다. 무서워할 새도 없이 공포가 머릿속에 장미꽃처럼 활짝 피었다.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가? 나는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던가? 그리고 그 연민의 가식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검은 소설’을 나는 뭐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단지, 그것이 전사(前史)적이라는 그 사실이 나를 이토록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인가? 그것의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소설이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고 곧장 내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공포와 함께. 두려움과 함께. 스스로의 가식에 치를 떠는 모멸감과 함께. 그 모멸감의 가식에 치를 떠는 나와, 너와 우리와 함께.
3.
흘러가는 시체를, 나는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며 떠나보냈다. 흘러가는 시체의 가슴에 난 긴 상처는 내 가슴에도 나있다. 시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길게……. 내가 커다란 칼을 들고, 죽어, 죽어, 죽어! 시체에게 칼질을 하자, 시체 역시, 소리 나지 않는(거울의 나는 성대가 잘려있다.) 소리를 질러대며 칼질을 했다. 와장창 거울이 깨지면서, 나는 시체에게 길다란 상처를 입혔고, 거울 속의 나는 와장창, ‘제로로 경계 지워진 층(zero-boundary layer)’을 깨고 내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그의 칼은 내 성대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왜냐면 깨어진 그 층은 어쩌면 그 자신보다 더욱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 널브러졌다. 나는 베란다의 창을 열어, 혹시, 이 소란을 들은 이가 없나를 확인한 뒤, 장롱에서 커다란 검은 가방을 꺼냈다. 가방에 어기어기 시체를 구겨 넣고, 강까지 어기어기 와서, 떠내려 보낸다. 잘 가, 잘 가……. 가슴의 상처가 쓰라리다, 눈이 아득타!
4.
소설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완강하게 ‘소설의 틀’로 인물들을, 시간과 공간을, 감싼 뒤, 그 바깥에서 소설을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스스로가 잔인해져야만 하는가. 그들의 아픔, 아픈 시간, 아파 흐느끼는 이곳. 이런 슬픔들을 천천히 직조해 나가면서, 그들의 감정과 동화되지 않고, 실 잣는 아라크네가 되려면, 얼마나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고 스스로 잔인해져야만 하는가. 소설의 틀이 완강해질수록, 그들(작중인물들)은 어쩔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설혹 그것이 해피엔딩일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슬픔의 가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틀이 해체된다는 것. 그것은 작가가 어떤 실험적인 의지가 있어서도, 교활한, 시류에 영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작중인물은 물론이거니와 작가까지)을 봉인에서 해제시키는 것이다. 슬픔과, 운명과, 이런 낭만적인 요소의 패악(悖惡)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안으로 밀치고 들어가, 그들과 하나로 섞이고, 그런 연후에 저절로 ‘거리를 둘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 소설가 김종호는 2000년에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하였다.
(2002.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