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꽝’은 거듭되지만 |이혜경|

더 이상 살림을 늘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거듭하는 동안 책은 방바닥이며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청소할 때면 책 더미를 발로 쓰윽 밀치는 홀대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책이 짐으로 보이는 바에야 펼칠 마음도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그쯤에 이르자, 살림을 늘리지 않겠다던 결심 또한 집착의 다른 형태가 아니었나 하는 회의가 일었다. 그래, ‘절대’ 안 늘리겠다던 건 아니었어, 라고 얄팍하게 타협하면서 책장을 주문했다.
책장이 오기 전에, 없앨 책들을 추려냈다. 지난번에 이사할 때 버린다고 버렸는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책이 여럿이었다. 누렇게 변한 책을 넘기다가 그만 풋, 웃음을 터뜨렸다. 책 뒤쪽에 누가 볼세라 작은 글씨로, 그렇지만 또박또박 써넣은 글자가 눈에 띈 것이다. 무적(無滴). 삶에 물방울 하나 남기지 말 것. 그럼으로써 무적(無跡), 마침내 적멸에 이르겠다는 다짐. 막 이십대에 들어선 내 옹골찬 결의가, 이제는 어지러이 인연을 만들고 설익은 글로 어수선한 자취 남기는 일도 서슴지 않는 나를 생동생동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쓴 일기를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태워 없앴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쓴 일기며 오간 편지들은 대학에 진학하던 해 재가 되었다. 피그르르 날리는 저 재처럼,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멸하리라 다짐을 거듭했다. 대학시절에 쓴 일기를 졸업하고 나서 태웠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흐리멍덩한 내 삶에도 그나마 일관성이 있다는 증거가 될테니. 하지만 그땐 이미, 언젠가는 글을 쓸 테고 그러면 일기가 밑천이 될 수도 있다는 치사한 계산이 선 뒤였다.
그 책을 넘겨보는데 연필로 그은 밑줄이 눈에 띄었다. 아니, 밑줄이라니? 이게 언젠데? 판권을 찾아보니 내가 대학 2학년 때 발행된 책이었다. 그즈음 서울대 출판부에서 차례로 내놓던 문학비평총서. 그러고 보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흥에서 회기동까지 전철로 통학하던 내가 전철 안에 선 채로 무게중심을 잡으려 애쓰면서 그 얄따란 책에 밑줄을 긋던 모습이. 그 무렵은 내가, 그 치기에 찬 서명에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책에 밑줄 따위는 긋지 않던 때였다. 아니 그럴 때였다고 나는 기억해왔다. 그동안 나는 내가 밑줄을 그은 최초의 책은 김화영 교수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문학 상상력의 연구』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첫해 겨울에 발간되었다.
글을 쓰겠다는 열망과 철저한 장삼이사로 살아가겠다는 다짐, 그 이율배반에 휘둘리던 젊은 날의 서명은 내게,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허술한 바탕 위에서 조립되고 유지되는가를 다시 깨닫게 했다. 보거나 들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사실에 숨겨져 있을 무수한 허방. 내 기억은, 내 일기에 담긴 사실들은 또 얼마나 편파적인 것일까. 입 밖에 내는 순간 진실로부터 뒷걸음질치기 시작하는 말. 그 앞에서 글쓰기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십대의 그 거창한 결의로 돌아가 입 다물고 지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이어진다. 마침내 춤추는 구두를 신어버린 소녀처럼 춤이 주는 도취와 벗어던지려는 열망 사이에 낑긴 채. 말해진 것과 진실 사이의 거리를 견디면서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이 지리멸렬하고 오리무중인 삶을, 때로는 바다처럼 너르고 때로는 바늘끝 하나 꽂을 데 없는 인간의 마음을 언젠가는 꿰뚫을 수 있으려니 하면서. 금생에서 그걸 이루는 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낮은 확률임을 뻔히 알면서도. 거듭되는 ‘꽝’에도 굴하지 않고. 누군가의 책장이나 채워 가면서.

* 소설가 이혜경은 장편 << 길 위의 집>>과 소설집 <<그 집 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