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부여 슈퍼 |김숨|

녹색 반팔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 차림의 나씨가 골목으로 걸어 나온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얼굴이 쌀뜨물처럼 희멀건하다. 눈동자는 초점 없이 풀려 있다. 나씨의 등 뒤로 ‘부여슈퍼’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간판 한쪽에 조그만 글씨로 ‘쌀, 과일, 부식, 생필품’이라고 적혀 있다. 나씨는 이 슈퍼의 주인이다.
햇볕에 드러난 골목은 피아노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나씨는 활활 부채를 부치며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반바지를 걷어 올린다.
평상 옆에는 수박과 복숭아, 포도 따위의 여름과일이 상자에 담긴 채 진열되어 있다. 진물이 흐르는 포도송이에는 날파리들이 달라붙어 있다. 모기향을 피워놓았지만, 날파리들은 좀체 끊이지 않는다. 나씨가 팔을 뻗어 포도 한 송이를 집어 든다. 날파리들이 포도송이를 따라 윙윙거리며 날아오른다.
“이놈의 파리 떼들이 간덩이가 부었나!”
궁시렁거리면서 포도 한 알을 따 입에 넣는다. 그리고 골목을 향해 씨를 툭, 뱉는다. 등 굽은 노파가 쯧쯧 혀를 차며 그 앞을 지나간다.
“할머니, 날이 더운데 어딜 그렇게 서둘러 가세요?”
“아, 늙었다고 방안에서 죽는 날만 기다릴 수 있나. 요 앞에 칼국수집이 개업했다고 해서 가는 거여.”
“그럼 천천히 댕겨 오세요.”
“자네, 종일 그렇게 가게 앞에 팔불출 같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으면 손님이 찾아오겠나.단장도 좀 새로 하고, 인상도 좀 웃어보란 말여. 이 과일들 시든 거는 죄다 내다버리고 말야.”
“네, 네 그래야죠.”
노파의 다그침을 듣는 나씨의 얼굴이 아이처럼 붉어진다. 나씨는 포도가 시금털털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먹던 포도를 박스 위에 아무렇게나 다시 던져놓는다. 그때 후줄근한 양복차림의 사내가 골목으로 걸어 들어온다. 머리숱이 성긴 사내의 뒤를 덩치 큰 개가 어슬렁거리고 따른다. 며칠 전부터 골목의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다니는 개다. 중복이 바로 내일이다. 사내가 나씨의 옆으로 와서 앉는다. 나씨가 사내의 눈치를 살핀다.
“맥주 한 병만 주시오, 땅콩도, 담배도 한 값만.”
나씨는 가게로 들어가 맥주와 땅콩, 유리잔, 담배를 쟁반에 담아 내온다. 나씨는 기분이 마뜩하지가 않다. 그 사내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백수건달이기 때문이다. 술만 마시면 이틀이 멀다 하고 같이 사는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댄다는 못 말리는 술주정뱅이에다 싸움꾼이다. 동네에는 사내와 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고향이 부여요?”
사내가 슈퍼의 간판을 가리키며 나씨에게 묻는다. 몇 번 슈퍼 안에서 마주친 적은 있지만 나씨에게 말을 걸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오.”
나씨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러고는 열불이 나는지 부채를 들썩인다. 그때 목욕가방을 든 여자 두 명이 슈퍼로 들어온다. 동네 여자들이다. 몸에서 샴푸냄새와 비누 냄새가 폴폴 풍긴다. 나이 탓에 축 쳐진 볼이 붉게 상기돼 있다. ‘팔자 좋은 여편네들이군, 삼복더위에 목욕탕엘 다니고.’ 여자들은 우유 한 팩씩을 마신 후, 가는 국수와 오이를 사간다.
사내가 빈 맥주병을 나씨에게 들어 보인다. 나씨가 다시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가지고 온다.
“그런데 남의 고향은 왜 물으슈?”
나씨는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사내가 좀 안되어 보였는지 말을 건넨다.
“왜 물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소. 자, 내 잔 한 잔 받으슈.”
뜻밖에 사내가 잔을 내민다. 나씨는 다시 흘끔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그 잔을 받아 쥔다. 사내가 거품이 넘치도록 맥주를 따른다. 나씨는 유리잔으로 얼른 입술을 가져가 거품을 쭉 들이킨다. 그렇지 않아도 목안이 칼칼한 것이 맥주 생각이 나던 차였다.
“자, 얼른 들이키고 한 잔 더 받아요.”
무더운 대낮이라서 그런지, 나씨는 맥주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어슬어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고향이 부여요?”
“거 참, 아니라고 했지 않소”
“미안하오. 내가 지금 내 정신이 아니라오. 나 사실은 지금 병원 영안실에서 오는 길이라오. 같이 살 섞고 살던 여자가 죽었소. 엊그제 밤에 교통사고를 당했지. 횟감을 싣고 가던 트럭이 들이받았소. 좀 모자라기는 했어도 육덕은 있었는데. 그 여자 고향도 부여였다오.”
나씨가 놀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본다. 가슴이 불현듯 뜨거워진다.
“난 정말 잘해주고 싶었소.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소. 동네 사람들 눈에는 내가 여자에게 손찌검이나 하는 불한당으로 보였겠지만 난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더랬소. 그리고 내 잘못을 반성하고, 정말 잘해 주고 싶었다오.”
“…….”
사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사내는 마지막 한 잔을 다 마시고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술값으로 지폐 몇 장을 빈 맥주병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
“흐흐흐, 이 돈은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이라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내가 말한다. 그는 흔들흔들 태양이 환하게 비치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피아노 소리가 사내의 뒤를 쫓는다.
나씨는 사내가 맥주 병 사이에 끼어놓고 간 돈을 얼른 집어, 사내에게로 뛰어간다. 그러면서 소리를 지른다.
“이봐요. 이봐요. 기다려요. 이 맥주는 내가 사는 걸로 할게요. 돈은 필요 없어요!”
골목에 나씨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별안간 하늘에서 후두둑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 소설가 김숨은 1998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하였다.
(2003.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