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칼럼] 지식인을 위한 비판 |함성호|

한국 지식사회가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없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임오년 월드컵 때 광화문에 모여든 시민들의 광기를 읽어내는데도 실패했고, 미군의 무한궤도 전차에 치어 죽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한 촛불시위를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읽어내기에도 실패했다.
월드컵의 열기를 보며 많은 지식인들은 그것을 집단 히스테리나 획일화된 전체주의로 보려는 구태의연한 비판적 시각을 버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태극기와 일사불란한 구호를 파시즘적 내셔널리즘에 기반을 둔 것으로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고소를 자아낸다. 비록 독일의 제3제국이 스포츠와 정치를 교묘하게 연결하기는 했지만 스포츠에 있어서 응원이라는 것은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할수록 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이 된다. 관중은 응원을 통해 경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스스로 경기에 개입하게 된다. 그래서 응원에 열중하는 관중은 그것이 더 조직적일수록 이루어지고 있는 경기와 별개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현대 경기장 건축의 주요 강령은 경기의 내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관중석의 배치보다 전체적인 경기장의 열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데 강조점이 주어진다. 마치 월드컵을 관제 데모로 오인한 것 같은 파시즘 운운하는 진단은 한국 지식인들의 일종의 피해망상이다.
고성능 망원렌즈로 잡은 황선홍의 피 흘리는 장면이 마치 극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서적, 감정적 몰입이 가능한 소비되기 쉬운 이미지로 제시됐다는 지적도 의식과잉이다. 황선홍의 피로 미디어는 무엇을 호도하려 했을까 생각해 보면 결론은 너무 단순해진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단순함을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김홍준의 지적처럼 ‘붉은 악마’, ‘노사모’처럼 더 이상 정보통제가 불가능하고 정보를 분석 · 해석할 뿐 아니라 생산해내기 까지 하는 대중 집단의 출현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바로 그 대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꿈에 그려 마지않던 대중이 출현했는데 정작 당황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의 등장 이후에 대한 우리 지식 사회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즘 촉발된 대중들의 반미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그대로, 그러나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꽃다운 두 소녀를 무한궤도 전차로 치어 죽인 미군 병사 두 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저지당하고 우리는 다시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지난 월드컵의 열기와 감동을 재현하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반미 구호를 외치는 자각한 대중, 이것도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바라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촛불 시위 소식을 접하며 갑자기 냉정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고를 낸 미군 병사의 부모들은 자신의 정부가 더욱 강력하게 나서 자식들의 입장을 보호해 주길 바랄 것이고, 제대로 된 정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 정부에 대해 일으키는 분노는, 단지 사고를 낸 미군 병사들이 무죄 판결을 받아서 만은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자국민의 보호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을 미국이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권에 대한 문제이다. 자국민이든 타국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미국은 자국민의 보호 때문에 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저버렸다. 인권은 어떤 형태의 정치체제보다 우선하며, 어떤 주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미국인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죄 판결을 받은 미군 병사의 짧은 머리를 보면서 문득 한국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 대해 혹 무죄판결을 내린 미국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광화문을 메운 저 감동의 촛불 행진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은 우리의 인권을 짓밟고,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먹이 사슬의 행진일 따름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땅에서, 이 낯 선 땅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망명자들을 위해서 촛불을 켜야 한다. 우리 땅에는 돈을 벌러 온 외국인들도 많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자신의 땅을 버린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해 주고 나서 미국을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는 우리의 짓밟힌 인권을 위해, 그리고 저 어린 나이에 무한궤도 전차에 깔려 숨진 어린 영혼들을 위해 촛불을 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해 분노하는 우리의 얼굴을 보고 분노하는, 다른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권이라는 것은 참 묘해서 우리의 권리를 먼저 챙기기보다는 타인의 권리를 먼저 챙겨주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연 무죄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번 대선에서 드디어 자각한 대중들은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의 역할은 이 번에도 미미했다. 그들은 기뻐할 수도, 절망 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무언가 그들의 자장 밖에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분석이 틀리고, 예측은 빗나가버렸다. 가리키며 나가자고 할 지향점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무기력이 지금, 한국의 상황을 만들어 나간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 나가야 한다. 이제라도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위한 준비에 있다. 우리는 너무 비판하는 자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까지 소비되기 쉬운 이미지로 팔려나간 것은 한 축구선수의 피가 아니라 한국의 지식인들, 바로 그들이었다.

* 함성호 시인은 시집 <<성 타지마할>> <<50억 7천만년의 고독>> <<너무 아름다운 병>> 등과, 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당 인생>>을 펴냈다.

(2003.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