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나이 듦에 대하여 |황인숙|

며칠 전 일이다. 잔칫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친구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버스 정류장까지 타고 간 택시의 기사는 내가 원하는 코스를 정체 구간이라고 비웃으며 고집스레 딴 코스를 택했다. 그런데 그 코스야말로 터무니없이 길이 막혔다. 우리는 피차 어색하고 뚱하여 차안에서의 시간을 초조하고도 피곤하게 보냈다. 택시에서 내리니 밤 여덟 시, 어둑어둑한 정류장 근처를 한 손에 케이크를 들고 어정거리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시간 있으시면…”
차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 아니오.”
나는 건조하게 대꾸하고 홱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서너 걸음 거리를 두고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친구의 차가 오기까지의 삼 분 남짓이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쉰다섯 살쯤 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제의에 대한 내 반응이 결코 그의 나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의 나이는 나를 착잡하게 했다. 아, 이제 저렇게 나이 든 사람이 나를 자기의 데이트 상대로 생각하는구나! 그 분에게는 정말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새삼 늙어 보여 마음이 스산해지는 요즘이다. 거울 속의 내 얼굴. 인간이 늙는 주기가 7년이라니까 앞으로 7년 동안은 더 이상 늙지 않겠군,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스물네 살 무렵,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동네 아저씨의 밑도 끝도 없는 “인숙이도 이제 애티가 하나도 없구나!” 말씀에 왠지 뽀로통 언짢았던 생각이 난다. 그로부터 거의 두 곱 나이가 된 지금, 젊은 티가 흔적 없다.
여기까지 쓴 다음, 뒤숭숭하여 메모 쪽지를 뒤적거리니 이런 게 나온다.
‘여성은 남성의 주목을 받는 대상이며, 여성은 욕망과 관련하여 지위가 규정되는 존재다. 남성의 시선은 욕망을 표현한다.’ (피터 브룩스)
페미니스트들의 화를 돋울 소지가 있는 언사다.
아직 한창 젊었을 때부터 내게는 나이 듦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가 있었다. 그 공포의 연원은 어쩌면 위에 인용한 말속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여성성이 엷어지면서 지위가 낮아질 것에 대한 공포? 여성성이 엷어지느니 진해지느니 하는 표현도 걸리지만 그에 대해서는 따로 따져보기로 하고, 그렇다. 남성―타인의 시선, 더욱이 욕망을 실은 시선을 귀찮거나 하찮다고 여기더라도, 자기의 여성성이 엷어져서 시선을 끄는 힘이 사라지면 생명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별히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대개 그럴 것이다, 라는 건 내 생각이고, 내가 특별히 덜 떨어진 인간인지도 모른다.
내가 스무 살의 아가씨라면 쉰다섯 살의 시선을 깔깔거리며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예순다섯 살에도 나는 쉰다섯 살의 시선이 착잡할 것 같다.
그렇다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스무 살의 청년이라면 쉰다섯 살의 내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길 수도 있겠지만 마흔다섯 살의 남자라면 쉰다섯 살의 시선을 어떻게 느낄까?
아, 늙는다는 건 시선의 자유조차 잃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욕망의 시선 둘 곳 사라진다.
‘에로티시즘이란 죽을 때까지 내내 삶을 긍정하는 것.’ (조르쥬 바타이유)
내 주눅 듦은 내가 내내 삶을 긍정하지 못해 왔다는 징표일지 모른다. 젊음에 대한 내 지나친 애착은 한 번도 에로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행하지 못한 자의 불건강을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몇 달 전에 버스 안에서 본 정경.
러시아워였다. 막 버스에 오른 육십 대 중반의 할머니 세 분이 다가오자 노약자석에 앉았던 일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그 늙은 여인네들은 감지덕지함이 아닌 사랑스런 오만함으로 자리를 양보 받았다. 한 할머니는 자리에 앉고 두 할머니는 둘러서고 그 뒤에 할아버지가 섰는데 모두 흐뭇한 기색이 완연했다. 많은 늙은 남자들이 젊은 여자를 좋아하거나 여자 일반에 무관심한데 그 할아버지는 달랐다. 수다를 떠는 자기 세대 여인들을 향한 그 분의 눈길은 호기심으로 집중돼 있었으며 그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버스 안의 다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할머니들께 몰두하여 얼굴에 홍조마저 띤 그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생기와 싱그러움은 나이를 초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정리해 보자.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쉰다섯 살 시선에 대한 착잡함인가? 아, 그러나 또한, 바로 그것을 극복하고 싶지 않아, 굴복하고 싶지 않아 몸서리쳐질 것 같은 이 병증이여!

* 황인숙 시인은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등의 시집과, <<나는 고독하다>>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200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