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문화적 행위로서의 걷기 |장석주|

생계 때문에 서울과 안성을 오고 간지 세 해 째다. 주초에 서울로 올라갔다가 사흘 간 강의와 방송 녹음 일을 마치고 금요일 밤에 잡역부와 같이 기진(氣盡)해서 집으로 내려온다. 나는 밤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오지 못하고, 시속 백이십 킬로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로 내려온다. 밤의 한 가운데를 광속으로 통과하는 운전을 하는 동안 초봄의 차가운 밤의 젖꼭지를 빨며 나의 상상과 욕망은 까마귀보다 더 빨리 자란다.
운전은 신체의 근육 기능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내 몸과 현존은 한 점으로 정지되었다가 이윽고 소실(消失)되는 블랙홀과 같은 고요에 빠져든다. 그 순간 외로움은 함부로 내던져 놓은 식칼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상념들과 무관하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운전자들이 던져놓은 식칼들이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는 것일까?
거리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엑셀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으면 신체 이동은 자동화된다. 이동하는데 근육의 힘을 빌리지 않는 몸이란, 철저히 수동성에 사로잡힌 몸이다. 그것은 몸이 아니라 목적지로 운송중인 소포에 불과하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을 때 나는 피동성의 강제 아래 놓인 채, 걷기의 물리학과 더 나아가 삶의 활기와 능동성까지 내어주고 이동 기계에 부속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어쩌다가 시속 백이십 킬로로 움직이는 기계에 의지해 신체를 이동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는 늘 몸의 리듬을 배반하는 속도를 전복(顚覆)하고 그리스 시대의 소요(逍遙)학파나 미얀마의 위빠싸나 도보승처럼 천천히 걷고 싶어한다.
소풍이거나 산책이거나 등산이거나 사람은 걸으며 주변 풍경을 시선으로 빨아들인다. 그러면서 자아와 그걸 둘러싼 세계와의 균형과 조화를 하나의 실감으로 겪는다. 천천히 걷는 자에게 풍경은 저의 심미적 정취와 생기를 수줍어하며 드러낸다. 자동차로 빠르게 스쳐 가는 자에게 풍경은 저를 드러내지 않는다. 주변을 해찰하며 걷는 자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풍경은 감응(感應)하며 비로소 탄생한다.
풍경이란 단순한 자연의 물리적 형상을 넘어서서 자아와 교감하며 자아를 저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수려한 산과 들, 계곡과 폭포, 단애(斷崖) 들, 그리고 소쇄원과 같은 곳은 우리를 심미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옛어른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고 일렀다. 산수는 사람 됨됨이의 태생적 근거로 작용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풍수지리학의 당위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걷고, 성지 순례자들도 걷고, 관광객도 걷고, 무단 횡단자도 걷고, 등산가도 걷고, 연인들도 걷고, 혁명의 이념에 동참하는 군중도 걷는다. 사람들은 걸을 때 살아 있는 존재임을 실감으로 체험한다. 나는 도시에 살 때 산책로와 골목길과 공원과 광장을 걷고, 그 마저 용이하지 않을 때는 런닝 머신 위를 열심히 걸었다. 시골에 와서는 오솔길과 농로와 산 능선을 걷는다. 칠팔 년쯤 신어 낡아버린 등산화의 끈을 동여매고 잎눈들이 막 눈뜨는 버드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저수지 주변이나, 사흥리 노루목을 지나 산 중턱을 휘감고 이어지는 임간(林間) 도로나, 험하지 않은 서운산 능선을 타고 한정 없이 걷는다.
걷는 것은 노동과 무위, 존재와 행위 사이에 작용하는 균형을 찾는 일이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제 몸으로 이 세계 위에 실존을 세우는 능동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걷지 않는다. 걷기라는 축복을 잃어버렸다. 걷기를 잃어버린 대신에 고립된 점과 같이 실내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 묶여 있다. 집에서 나와 자동차로 이동하고, 스포츠센터나 사무실로 들어간다.
이 상호 단절된 실내들은 몸에게 최소한도의 육체의 감각이나 움직임만을 요구한다. “움직이는 육체는 자기의 부분들의 통일성을 다양한 ‘거기들’을 향해서/통해서 움직이는 연속적인 ‘여기’로 경험한다.”(레베카 솔닛, <<걷기의 역사>>)고 할 때, 실내 거주자들은 나와 세계 사이에 작용하는 균형이나, 세계로부터 하나의 실감으로 되돌려 받는 자아의 연속성을 잃는다. ‘거기’는 있는데, 몸이 움직이는 연속으로써 하나의 실존으로 점화되는 ‘여기’는 없다.
오늘날 신체 없는 삶의 비극은 보편화된 삶의 양식이다. 사람들은 신체를 이동하며 일을 도모하고 그때 삶의 가치와 의미가 발생한다. 유목, 탈중심, 주변화, 탈영토, 경계, 이주, 망명과 같은 탈현대 이론의 핵심어들은 한결같이 신체의 위치와 이동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몸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동하지만, 이 몸의 이동에는 근육과 운동신경의 가능성들은 빠져 있다. 우리는 ‘몸’ 없이 헛것, 혹은 유령들로 움직인다. 신체가 없는 곳엔 삶도 없다!
자동차는 속도를 담보로 내 신체의 가능성을 차압한다. 나는 속도의 기결수(旣決囚)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그만 나를 떠나버린 세상의 소로들과 오솔길들에 대해 나는 미안해한다. 나는 고생물학자처럼 순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내일은 조금만 걷자. 칠장사에서부터 출발해 산 능선을 타고 한 나절이라도 걷자.

* 장석주 시인은 1975년부터 문단에 나와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등의 시집과,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등의 문학비평서를 펴냈다. 엠비씨와 케이비에쓰 라디오의 <라디오 책세상>과 <책마을 산책> 등에 고정 출연하고,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 출강하고 있다.

(200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