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은밀한 □□ |한유주|

골절, 탈구, 염좌, 좌상, 너는 어깨가 아프다, 고 말했다. 며칠째 흐린 날이 계속되었고, 드문드문 비까지 내렸었기 때문에 나는, 저기압, 추위, 어두움, 한 달 전부터 시작된 기침이 날마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심해지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뼈 안쪽에 고여 있던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어깨가 아프다, 고 말하면서 몸 안에 물이 늪처럼 고여 있을 턱이 없다, 고 말한다. 물구나무를 서 봐, 그러면 물이 거꾸로 빠져나올지도 모르잖아. 나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기대고 있던 벽이 울릴 만큼 거세게 기침을 했다. 이건 네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고 말하면서 너는 네 어깨를 감싸 쥔다.
나는 햇빛, 자동 카메라, 연한 바다, 남태평양의 투명한 대기를 상상한다. 너는 내가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왔고, 느린 속도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죽음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힐난)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겨울, 봄, 겨울, 겨울, 그늘까지도 따스한 곳으로, 이 계절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적도와 스콜, 열대와 우림, 그 곳의 바닷가에서 설핏 잠들었다 깨어나면 저물 녘 노을처럼 잦아들던 내 진공(眞空)의 폐와 기관지도 살아날 것 같다는, 그러나 너는 어깨가 아프다, 고 재차 말한다. 너는 갈 수 없을 거야. 행여 가더라도 축축한 이끼처럼 젖어있던 네 몸은 햇빛을 이겨낼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렇지만, 그런데, 그리고 그러나, 그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내 늘어뜨린 두 팔과 구겨져 있는 두 다리를 너는 본다, 그리고 아프다는 어깨를 한 손으로 힘껏 쥔 채로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넨다. 순간 네 어깨가, 네 몸으로부터 뜯겨나간다, 를 내 두 눈이 착각한다. 불현듯 두렵다, 이 불안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활짝 펼쳐진 책의 페이지마다 바다와 하늘이 고여 있다. 풍경은 누군가의 눈과 카메라와 필름과 인화지, 그리고 초벌과 재벌의 인쇄를 거치는 동안, 기억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침식당했다. 낯선 지방들, 낯선 강과 바다의 이름들은 공허한 활자, 불구의 몸이 된 풍경을 지배한다. 나는 애써 두터운 책의 겉장을 덮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다만 미세하게 덮여있던 먼지가 스스럼없이 살짝,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은밀한 □□. 겉장에 쓰인 책의 제목은 뒷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흔적, 얼룩, 구멍, 몇 겹인가의 시간이 흘러간 흔적이었다.
나는 책을 네게 다시 돌려주려고 한다. 푸르스름한 형광등의 창백한 눈빛이 네 얼굴, 네 어깨를 감싸 쥔 손가락 사이를 훑고 있다. 빗줄기는 왜 끊어지는 일도 없이 지속적으로, 땅 위에 부딪혀오는 것일까, 빗소리도 여전히. 너는 가만히 입을 놀려 어느 풍경이든 그 본질은 같은 것이라고, 그 어느 곳에 네 몸을 세워놓더라도 모두 다 같은 일이라고, 그리고 어깨가 아프다, 고 말한다. 나는 다시 폐부를 텅텅 울리면서 기침을 한다. 낭하, 미로, 폐허,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어둡고 습기가 가득한 내 가슴뼈 안쪽의 풍경을 상상한다. 그 안의 한 구석에 전구를 하나 켠다. 깜박인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너는 갈 수 없어, 이유는 없어 다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순간, 내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네게 건네려던, 멍하니 들고 있던 책이, 힘이 빠진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책이 떨어지면서 몇몇 책장들이 활짝 펼쳐지기도 한다. 분노와 절실함이 거세된 풍경들이 시간과 마지막으로 작별한다. 흘러감, 은 단절된다. 책이 천천히, 한없이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너는 어깨가 아프다, 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순간, 너와 나의 주변과 곳곳을 둘러본다. 그림자가 사라졌고, 살짝 열린 창틈으로 들이치던 빗방울도 사라졌다. 두시 이십사 분, 열두 시 삼십칠 분, 이십 시 백 오십사 분, 공간이 견고하게 굳어있다. 나는 다시, 두터운 책의 겉장이 절망적인 몸짓으로 바닥에 닿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바닥이 조용히 진동한다. 그 때, 겉장 위에 적혀 있던 제목의 낡은 …은밀한… 활자가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번져가고 있었다. 마치, …□□라는 것처럼.
* 소설가 한유주는 <<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를 통해 등단하였다.
(2003.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