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말을 줄일 수 없는 고통 |나희덕|

당신의 삶에서 줄이거나 금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지난 주 나에게도 이 질문을 자못 진지하게 던질 기회가 있었다. 이른바 ‘고난 주간’을 맞아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자초해 보리라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나는 그동안 이렇다 할 종교적 깨달음이나 실천도 없이 지내온 편이지만, 그래도 모태신앙이라는 원초적 기억의 힘에 이끌려 주일이면 성경책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그날따라 ‘고난 주간’ 동안이라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한 가지씩을 줄이거나 금해보라는 권유가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나에게서 무엇을 줄였을 때 가장 치명적인 고통에 이를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생각해 보았다.
궁리 끝에 내가 선택한 고통의 항목은 ‘말’이었다. 가장 간절히 줄이고 싶고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말’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말’에 지쳐 있다는 증표도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결심하려는 순간, 당장 다음날 아침부터 강의가 기다리고 있고 며칠 안에 꼭 넘겨야 할 원고가 두세 편은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말’을 행사하지 않고는 한나절도 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니! ‘말’에 덜미가 단단히 잡혀서 이제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말’은 나에게 고난을 명하시는 저 신의 음성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말을 줄여야겠다는 의지가 무의식이나 몸을 움직일 만큼 간절했던지, 그날 밤부터 갑자기 감기 기운이 들면서 목이 붓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음날 수업을 하려고 하니까 목이 잠겨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그 다음날에는 썩어가던 사랑니가 아침부터 쑤셔서 출근길에 치과에 들러 이를 뺐다. 어금니에 피 묻은 솜을 물고 나는 무려 세 시간 가까이 금언할 수 있었다. 하여튼 이런 방식으로라도 말을 줄이는 고난의 기회를 부여해주신 신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더 강하게 느낀 것은 말을 줄이는 고통이 아니라 말을 줄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란 말과 고통스럽게 싸우면서도 그 고통을 반납할 수 없는 이중의 고통을 겪는 자가 아닐까 싶다. 이 일만 끝내면 멋진 휴가를 떠나야지 벼르고 또 벼르는 회사원처럼, 이 원고만 끝나면 정말 ‘말’로부터 도망가야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말의 가난한 소작농일 따름이다, 일구고 또 일구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도해 본 금욕의 실험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내 삶이 침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한 주였다. 고난주간이 끝난 뒤에 부활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말’의 고난을 제대로 겪어내지 못했으니 ‘말’의 부활 또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신생의 언어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나는 역시 ‘말’이라는 교주를 섬기는 변덕스러운 신도임이 분명하다.

* 나희덕 시인은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등을 펴냈다.
(2003.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