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불두화와 개를 생각하며 |최두석|

불두화는 초여름에 절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꽃이다.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둥글고 하얀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는데 마치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런데 비유를 좀더 끌고나가자면 비를 내리지 못하는 가문 날의 뭉게구름 같다. 암술과 수술이 없어서 가루받이를 하지 못하고 열매나 씨앗도 맺지 못하는 헛꽃, 즉 무성화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가정집 화단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집안에 심는 걸 꺼려했다. 자손의 번창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불임의 꽃을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고 그 점은 역으로 불두화를 절간에 많이 심은 이유이기도 하다.
불두화는 우리의 산에 자생하는 백당나무의 변종이다. 숲 속에서 자생하는 백당나무는 무성화가 유성화를 둘러싼 모습으로 함께 핀다. 울창한 숲 속에서 관목인 백당나무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꽃이 필 때는 쉽게 발견된다. 크고 화사한 무성화가 시선을 끌기 때문인데 그것은 곤충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무성화가 벌과 나비를 부르고 막상 가루받이는 그 안쪽에 있는 유성화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불두화는 백당나무의 유성화는 거세되고 무성화만으로 이루어진 돌연변이 종이다.
백당나무 열매는 선연한 붉은 빛을 띠고 가을에 익어 새들의 먹이가 된다. 낙엽이 진 겨울산에서 오보록하게 달린 백당나무 열매는 한층 더 해맑은 빛을 띠고 눈길을 끈다. 겨울철 배고픈 새들에게 먹이가 여기 있다고 유혹하는 것이다. 새들을 통해 씨를 멀리까지 퍼뜨리기 위한 백당나무의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두화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번식이 불가능하다. 불두화가 언제 생겨났는지 알 수 없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번식을 하려면 사람이 꺾꽂이나 분주를 해야 한다.
백당나무가 불두화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이유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우연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백당나무는 불두화로 변신하여 인간들의 정원에서 사랑받는 나무가 되었다. 하얀 공 모양의 꽃송이가 탐나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정원에 불두화가 뿌리내리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두화로의 변신은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 어쩌면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한 백당나무의 전술인지도 모른다. 백당나무인 채 인간의 정원에서 장미와 경쟁할 수 없으므로. 그런데 그 전술에는 마치 배수진처럼 처절한 데가 있다. 사람이 꺾꽂이나 분주를 하지 않는 한 불두화는 번식할 수 없으므로. 거세함으로써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 들어온 꽃, 불두화! 불두화는 기꺼이 인간과 운명을 같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과 가장 친하다는 개는 어떠한가? 개는 저희들끼리 짝을 찾아 번식할 수 있기에 생식 면에서 인간에의 의존도 혹은 충성심이 불두화보다는 덜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개가 생식능력을 잃었을 경우 사람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복제기술이 생식능력을 대신할 만큼 발달한 세상이 온다면 개가 갖는 생식능력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가축의 생식에 관한 한 거세한 돼지나 전깃불 아래서 알을 낳는 닭에서 보듯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가리지 않으므로.
개는 이리와 유사한 종으로 구석기시대에 가축으로 길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의 해석이고 개의 입장에서는 인간에 의탁함으로써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야생상태의 이리가 멸종의 길을 걷는 데 반해 개가 다양한 품종으로 번성하고 있는 것은 지구의 지배자인 인간에게 대대로 충성해왔기 때문이다. 개의 인간에 대한 적응력은 놀라워서 사람이 양을 치면 양을 몰고 사냥을 하면 곰에게도 달려들고 투견장에서는 같은 종족끼리 사투를 벌이고 심지어는 곱게 단장하고 패션쇼에 등장하여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도 한다. 이러한 개의 인간에 대한 적응력 혹은 눈물겨운 충성심이 오늘날과 같은 개의 전성시대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전북 임실군에 속한 오수에 가면 의견비가 있고 개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어떤 품종인지 정체불명인 그 주인공에 대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개 주인이 만취해 길가 풀밭에 쓰러져 자는데 하필 그때 불이 났다. 아무리 깨워도 주인은 인사불성이고 개는 할 수 없이 냇물에 드나들며 온몸으로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는 것이 전설의 골자이다. 이러한 의견전설을 빌미로 임실군에서는 해마다 개축제를 벌이는데 실상은 사람들을 모아 장판을 벌이자는 데 목적이 있다. 아무튼 전설의 고향 오수는 보신탕으로도 유명한데 보신탕을 먹어봐야 축제의 진미를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머리로는 의견전설을 되새기면서 입으로는 보신탕을 먹을 만큼 비위가 튼튼한 사람이라야 세상을 능숙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 뜻이 자못 심오하다.
이제까지 불두화와 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실은 인간 세상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백당나무나 이리와 같은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세상에는 백당나무나 이리처럼 사람과 친숙하지 않은 동식물이 훨씬 더 많다. 수많은 생물학자가 오랫동안 찾았지만 아직도 그 존재를 모르는 종도 적지 않다. 그러한 동식물의 생존의 터전을 인간은 마구잡이로 짓밟는다. 인간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에 멸종해도 상관할 바 아니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생명을 보존하기보다 파괴하는 방향으로 발달한 인간의 능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한대로 발휘되고 있다. 어떤 동식물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채 막무가내로 거대한 댐을 막고 방조제를 건설해왔다. 다른 동식물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공포스러운 괴물이 등장하였는데 바다와 하늘까지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요즘 뜨거운 문제가 되고 있는 새만금 갯벌과 바다에는 측량할 수 없이 많은 해양 동식물이 살고 있다. 새만금 갯벌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새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 가운데는 멸종 위기에 놓인 희귀종도 있다. 여의도의 140배 면적의 방대한 토지를 확보한다는 새만금 간척사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의 삶터를 일시에 빼앗는 일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목을 조이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생명 살상의 규모로 보아 아우슈비츠의 학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 말살이 진행 중이다. 바지락이나 낙지 등이 산출되는 갯벌의 경제적 가치가 농토보다 높다는 환경론자의 논리는 생명 말살의 참상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문제이다. 지구에 생명을 붙이고 살아가는 동물의 한 종인 인간으로서 다른 생명을 학살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 한신대 문창과 교수인 최두석 시인은 <<대꽃>>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등의 시집을 펴냈다.

(2003.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