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제발 이러지 말고 잘 살아보자 |김연수|

보통의 남자들이 들으면 나를 향해 비웃음을 보낼 테지만, 내 생에 가장 절망적인 시간은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보충역 판정을 받을 때만 해도 ‘이젠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훈련소에 들어가 훈련을 받아보니 이건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수련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어릴 때만 해도 나는 땀 빼는 게 싫어서 체육시간에 축구를 할라치면 골키퍼만 보던 사람이었다. 훈련소에서 조교들의 명령에 따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다 보니까 도대체 나 같은 사람까지 꼭 군대에 들어와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까지 입대할 필요성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해 그 놀라운 사실을 알릴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그 4주간의 훈련을 통해 나는 250미터 떨어진 과녁에 20발을 모두 정확하게 쏠 수 있는 사격술을 배웠다, 라고 하면 엄청난 농담이고 그저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삶이 입 속의 혀 같은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힘들긴 해도 뒤집어 보기도 할 텐데, 세상일이란 그렇지 않은 법이었다. 그제서야 진심으로 겁이 났다. 이제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같았으면 ‘기왕 이렇게 된 것 열심히 사격술이나 연습하자’고 생각했겠지만, 이십대 초반의 사고 체계에는 긍정적인 회로란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일단 그 사고체계로 들어가면 부정적인 결론으로 귀결됐다. 내가 배치 받은 부대는 전쟁이 터지면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북한군 특수부대를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만큼 저지한 뒤, 예비군들에게 인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방위병 주제에 북한군 특수부대를 막는다는 것도 웃겼던 데다가, 기껏 저지시킨 북한군 특수부대를 훈련이라고 와서는 ‘밥 가져오라, 라면 사오라’ 외치기 일쑤인 예비군들에게 인계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데도 작전 계획이 방위 이등병의 생각을 참조해서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방위병 주제에 북한군 특수부대를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훈련해야만 하니 그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출근하면 교육 받고 기합 받느라 거지꼴이 될 정도로 녹초가 된 뒤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끼리, 방위부대는 방위부대끼리 전쟁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북한에는 방위부대가 없는 것일까? 그런 저런 생각 끝에 아직 남은 날을 계산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그 즈음, 나는 조울증에 시달렸다. 아주 사소한 일에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오르내렸다. 깔깔거리고 웃다가도 조금 있다가 보면 온갖 인상을 찌푸리는 식이다.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만 있으면 그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던져버리겠다는 식으로 달려들었고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속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욕설을 퍼부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의 행태와 비슷했다. 나를 방위부대에 버려두고 도망간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건 바로 나만의 삶이었다. 여행이라도 떠나봤으면, 밤새 술을 마셔 마시고 하루 종일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등등이 그 당시 나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삶은 내게 그 정도도 해주지 않았다. 삶이 저주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부대로 출근하면 점호하기 전에 군대식으로 지어진 화장실을 청소하는 게 일이었다. ‘군대식’이라는 것은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지은’이란 뜻이다. 호텔 화장실 같은 것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매일 청소하다보니 그래도 참지 못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본부중대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여러 가지 물건으로 꾸며놓아 언뜻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꾸며놓은 것 중에 ‘이 주의 금언’이라는 게 있었다. 비닐을 붙인 합판 안에다가 매주 이런저런 금언을 바꿔 붙였다. 예컨대 ‘겉으로 보기에 무척 연약해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힘이다 ― 파스칼’ 같은 글을 차트 글씨로 써 붙여놓는 식이었다. 그런 글귀에서라도 교훈을 찾았다면 조울증이 치료됐겠지만, 그런 금언을 붙이겠다고 제일 처음 마음먹었던 사람도 그런 효과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날도 잠에서 덜 깬 멍청한 표정을 하고 화장실로 갔다. 집게로 창가 재떨이와 소변기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다가 ‘이 주의 금언’을 언뜻 봤다. 계속 청소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다시 봤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다. ‘즐겁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 공자’. 그걸 보고 나는 한참동안이나 웃었다.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자님께서 내 소매를 붙잡고 ‘우리, 상심에 이러지 말자’고 애원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보통의 남자들이 들으면 나를 향해 비웃음을 보낼 테지만,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온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배웠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잘못 쓴 그 금언만큼 큰 깨달음을 주지는 않았다. 삶의 길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상심에 이러면 안 된다. 우리 이러지 말자. 잘 살아보자.

* 소설가 김연수는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