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매혹적이고 곤혹스러운 일 |정혜경|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구요.”

이 말은 ‘나’가 뭐냐고 묻는 CF 광고도, 집 나온 여인의 자기 선언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이 명쾌한 ‘나’에 대한 정의를 「The Hitchhiking Game」에서 기발하게 비틀어 놓는다.
사랑하는 남녀가 2주일간의 휴가를 떠난다. 끝없는 들판이 펼쳐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연료가 바닥났고 그들은 겨우 주유소를 찾아낸다. 화장실 하나 제대로 없는 주유소에서 남자가 기름을 넣는 동안 여자는 차에서 내려 잠시 작은 덤불 뒤로 사라진다. 그녀가 다시 고속도로로 나오자 남자의 차가 나타났다. 그는 히치하이커에게 하듯 “아가씨, 어디로 가세요?”하고 물었고 그녀는 낯선 운전자에게 하듯 자신의 목적지를 댄 후 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장난삼아 시작했던 게임에 몰입하게 된다. 서로를 잘 모르는 운전사와 히치하이커로. 친절했던 남자는 여자를 점점 거칠게 다루며, 수줍음을 많이 탔던 여자는 그에게 더욱 노골적이고 음란한 몸짓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각자의 낯선 모습에 놀라며 과연 어떤 모습이 본래의 자기인지 판단할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든다. 감정도 사랑도 없는 낯선 자들 간의 섹스를 끝낸 후 그녀는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구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해낼 수 없다.
여기에서 어느 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인지 혹은 가상인지 가려내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낯선 모습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보고 싶어 했던 욕망에서 불거진 것이었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감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낯선 자신이 두려웠지만 즐거웠으며 즐거우면서 두려웠다. 어찌 해 볼 수 없는 이 기이한 아이러니 속에서 그들이, 또한 우리가 수긍할 것은 무수한 ‘나’‘들’이다. 현대 문명에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가.
무수한 ‘나’‘들’이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무정형으로 흐르는 유동성(流動性)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긍정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사회는 도덕이나 질서의 이름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통합하도록 강요하며, 무엇보다도 개별적인 인간 스스로가 그 복수(複數)의 ‘나’를 견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확고한 ‘나’, 선명하고 안정된 ‘나’를 원하는가. 진정한 본질의 세계를 가정하고 그 든든한 보루를 향해 정착하고 싶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함정이 출몰하지 않는가.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를 부정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에 가서 그가 아버지의 시점을 가정하여 이제까지의 자신의 이야기 전체에 반론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카프카가 다시 아버지의 잣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이 반론 전체가 아버지한테서가 아니라 바로 저한테서 나온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남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신조차 제 자신에 대한 저의 불신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행위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나’‘들’을 긍정하는 것, 더 나아가 스스로 ‘나’를 끝없이 동요시키는 것은,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없는 여행의 캄캄함을 즐기는 일이다. 이는 매혹적이지만 또한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가.

* 문학평론가 정혜경은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소통의 문제와 이야기하기의 방식>, <육식성과 잡식성 글쓰기>, <불연속적인 얼굴들, 그 낯선 아름다움 속으로>, <가벼움의 미학> 등을 썼다.

(200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