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럼] 수재 이데올로기 |김태환|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수재를 숭배하며, 수재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품어왔다. 수재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보면 수재란 “머리가 좋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 ‘머리가 좋다’, ‘재주’ 같은 말들은 모두 선천적 능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참고로 재주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과 슬기.” 따라서 수재에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선천적 능력의 부분에 큰 비중을 둔다는 것, 그런 만큼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추가되는 부분을 경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수재를 숭배하는 태도 뒤에 이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을 후천적으로 쌓은 실력이나 업적보다 더 중시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으며 이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재능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들은 흔히 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이른바 명문대학의 인기학과에 들어간 사람들을 수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적이 좋다는 것은 타고난 머리와 재주 이상의 것이다. 성적이란 타고난 능력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획득된 실력이며 일종의 업적이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다만 좋은 성적의 전제일 따름이고, 여기에 오랜 배움과 스스로의 노력이 뒤따를 때 좋은 성적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나 학과의 학생들을 수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꼴이 된다. 즉 노력을 통해 얻어진 업적이 수재라는 명명 행위를 통해 선천적 능력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은 공부 잘 하는 학생들 가운데도 원래 머리가 좋아서 잘하는 학생과 머리는 좋지 않은데 노력을 많이 해서 잘하는 학생을 구별하고, 전자의 부류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노력파’라는 말은 ‘수재’에 비해 상당히 폄하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이 때 전제되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을 가능케 하는 요인 가운데 선천적 요소가 후천적 요소를 상당한 정도로 대체할 수 있으며, 전자의 비중이 후자에 비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역으로 공부 못하는 학생들도 두 유형으로 구별된다. 머리는 좋은데 워낙 노력을 안 해서 못하는 학생과 아무리 노력해도 머리가 따라가지 않는 학생. 공부 못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자기 자식이 그나마 첫 번째 부류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여기서도 한국 사회에서 머리 좋다는 속성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위안이 집단적 차원으로 확장되면 “한국인은 두뇌 하나만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라는 통념이 생겨난다. 그런데 왜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을까? 여러 가지 제도나 여건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머리는 참 좋은데 노력 부족으로 공부는 잘 못하는 학생을 닮았다.
셋째, 한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서울대학교는 입학한 학생들을 어떻게 뛰어난 인재로 양성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우수한 학생들을 잘 골라서 입학시킬 것이냐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서울대는 대학 입시가 쉬워지고 학생들의 학력 평가에 있어서 변별력이 떨어지는 데 대해 항상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고, 어려운 본고사가 포함되는 입시 제도를 선호해왔다. 모든 입시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학교가 가급적 실력이 있는 학생들을 뽑으려고 욕심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서울대 교수들이 입학생들의 수준 문제에 대해서 예민한 것만큼이나 대학 교육을 다 거친 졸업생들의 수준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왔는지가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오히려 공부 잘 하는 수재들이 모였으니까 다들 스스로 공부하고 알아서 잘 할 거라는 식의 어떤 방임적 분위기가 서울대 안을 오랫동안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재’를 뽑는 것에 집착하는 만큼 들어온 ‘수재’들에 대한 배려는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수재’들의 지적, 학문적 성장의 결정적인 몫은 졸업 후 유학을 장려하는 다양한 제도적 관행과 장치를 통해 구미 대학에 위임해 왔다. 이러한 무책임을 조장한 것 역시 수재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다.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들의 높은 학력 수준은 그들 개인의 타고난 능력이 엄청난 입학 경쟁의 압력 속에서 하드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수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수재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더욱 더 계발되고 형성되어야 할 수재인 것이다. 대학이 이들에게 하드 트레이닝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대개 중·고등학교에서 단련된 수재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선천적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따라서 수재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는 식의 수재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수재에게는 재앙이 된다.
나는 최근 어떤 책을 읽다가 미국의 모기관이 발표한 현대 사상가 50인 가운데 60% 이상이 프랑스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본 일이 있다. 과연 현대 사상가 50인을 선정한 기준이 얼마나 공정한 것이냐를 문제 삼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자타가 공인하는 현대 사상의 거장들이 프랑스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엄청난 철학적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부진’이 눈에 띈다. 현대 사상계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격차가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머리 차이에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히틀러 시대 때 탁월한 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독일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독일의 대학은 이로 인해 황폐화되었고, 전후에도 그 후유증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수재가 대학에 들어가도 훌륭한 가르침과 자극을 제공하는 선생이 없다면 발전할 수 없다. 접촉과 자극, 이에 따른 후천적인 능력의 계발이 결정적인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대가들이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선천적 재능은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어떤 좋은 자극도 쇠귀에 경 읽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환경과 자극을 만나 일정한 방향을 얻지 못한 선천적 재능 역시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 평론가 김태환은 평론집 <<푸른 장미를 찾아서>> 이외에 <<비판적 문학이론과 미학>>(페터 지마) 등의 변역서를 펴냈다.
(2003.12.29)